북한교회를 가다⑧ 평양장충성당 편(중)

이번 시리즈는 총 20회에 걸쳐 북한의 ‘범 기독교 교회’들을 탐방한 ‘북한교회를 가다’를 연재합니다. 남한이나 서구식 기독교가 아닌 ‘북한식 기독교’의 실상을 살펴보며 마치 초대교회 형태처럼 정착한 ‘북한식 사회주의 교회’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합니다. (최재영 목사 이메일: 9191jj@hanmail.net)

편집자 주: 통일뉴스 동시 게재

장충성당 제의실에 걸린 빛바랜 교황사진을 보며

나는 장충성당 마당에 도착해 사제관과 조선가톨릭협회 중앙위 사무실 등 부속 건물들과 뒷뜰의 두유공장 등을 대략 둘러 본 후 본당 안에 들어갔다. 성당 크기는 시골 공소보다는 크고 본당보다는 작게 보이는 적당한 규모였다. 마침 본당에는 신자들의 무리들이 평일 모임을 마치고 파하는 상황이라 그런지 분위기는 역동적이었고 온기가 넘쳤다. 성당 내부의 벽면은 온통 하얀 색으로 도색돼 순백의 화려함과 소박함이 우러나와 마치 향기처럼 느껴져 성스러움을 더해주는 듯 했다. 난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자동적으로 좌석에 앉아 잠시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관계자들의 도움으로 성당 내부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중 감실(龕室)과 제의실(祭衣室) 등 마치 일반인들에겐 금단의 구역처럼 느껴지는 은밀한 곳들을 둘러봤다. 24시간 성체등(聖體燈)이 환하게 켜져야 할 감실내부는 어두컴컴해 민망한 마음이 들어 재빠르게 문을 닫았다. 이어 제의실을 들리니 벽면에는 약간 빛바랜 사진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이 사진은 성당이 세워진 후 25년 동안 한결같이 이 자리에 걸려 있는 것이라고 했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어느 가톨식 신자 내외가 축복을 받는 장면처럼 보였는데 사진속 주인공들은 바로 장충성당에 출석한 박덕수, 홍도숙 내외였다.

이 부부는 전쟁 후 지금까지 이북 땅에서 가톨릭 신앙을 유지해왔던 그루터기 신앙인이었으며 장익 신부에 의해 바티칸의 초청을 받아 부활절 미사에 참석 후 교황을 알현한 장면이었다. 어려움 중에도 수십년간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낸 그들로 인해 북에도 가톨릭신자들의 모임이 결성되었고 연이어 장충성당까지 건축되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꺼지지 않은 작은 불씨가 큰 불을 끌어당기는 촉매제가 되어 마침내 이북에도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지난 회에는 현 장충성당 자리가 해방전부터 ‘선교리 성당(대신리 성당)’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분원(分院)이 있던 유서깊은 곳이라는 것을 밝혔으며 오늘은 장충성당이 세워지기까지 보이지 않는 막후에서 긴박하게 움직였던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북측과 바티칸, 바티칸과 북측과의 일대일 교섭 또한 바티칸을 끼고 남과 북이 서로 교섭한 일들, 혹은 남과 북이 직접 접촉하거나 해외교포 사제를 통해 남과 북이 접촉한 사례들을 순서대로 살펴볼 것이다. 나는 이를 위해 미리 자료를 준비해 장충성당의 김철웅 신도회장과 대담을 했고 역사적 순서대로 되짚어봤다.

장충성당 안에서 김철웅 신도회장과 장시간 대담하는 필자. ⓒ최재영
장충성당 안에서 김철웅 신도회장과 장시간 대담하는 필자. ⓒ최재영
장충성당 제의실에 걸린 액자. 사진은 북측 가톨릭 신자 부부가 88년 4월에 교황을 알현하는 장면이다. ⓒ최재영
장충성당 제의실에 걸린 액자. 사진은 북측 가톨릭 신자 부부가 88년 4월에 교황을 알현하는 장면이다. ⓒ최재영

장충성당이 건축되기까지 막후에서 벌어진 10가지 사건

병아리 한 마리가 태어나려면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껍질속 병아리는 밖으로 나오려고 발버둥치며 껍질을 쪼아대는 ‘줄(啐)’을 해야 하고, 동시에 밖에서는 어미 닭이 껍질을 강하게 쪼아대는 ‘탁(啄)’이 있어야 마침내 두꺼운 껍질이 깨지며 생명이 탄생한다. 이처럼 껍질 안에서는 북이, 밖에서는 남과 바티칸측이 서로 조화를 이뤄 모두가 ‘줄탁’의 역사에 힘을 썼기 때문에 가톨릭신자단체 출범과 장충성당 건축이 가능했다.

생전의 김수환 추기경은 과거 북핵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울 때면 종종 “제 책임이 커요. 제가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평양에 사는 김일성 주석은 저의 ‘어린 양’입니다. 목자로서 양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에…” 라는 발언을 했다. 만일 이 말을 북측에서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불을 보듯 환하다. 김 추기경은 비록 겸직이지만 교황청의 공식 임명을 받은 평양교구장으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목지 평양을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자괴감과 뒤섞여 했던 말일 것이다. 1975년 김 추기경은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된 뒤 82년 ‘북한선교부’를 발족해 남북교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장충성당이 세워지기까지 간적접으로나마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다.

바티칸에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남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이 막후에서 긴박한 역할을 감당했고, 아울러 교황과 김 추기경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북을 왕래했던 장익 신부가 전체적인 조율을 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들을 매끄럽게 수행했다. 장 신부는 10가지 사건의 한 복판에서 실무적으로 연관되어 일했던 주역이었다. 한반도 통일과 남북의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기도를 보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서울과 평양교구장직을 겸임한 김 추기경의 사명과 열정 그리고 바티칸과 남측, 바티칸과 북측, 남측과 북측, 교황과 추기경, 교황과 북측 사이를 부지런히 왕래하며 여러 가지 역할과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장익 신부의 사목적 조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0가지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1958년 당시 신학생이던 장익(맨 좌측), 장진(맨 우측)형제가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23세'를 알현하는 장면. ⓒ최재영
1958년 당시 신학생이던 장익(맨 좌측), 장진(맨 우측)형제가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23세’를 알현하는 장면. ⓒ최재영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운데),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환담을 나누는 장익 신부. ⓒ최재영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운데),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환담을 나누는 장익 신부. ⓒ최재영

1. 남과 북을 공평하게 사랑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기도와 열정

1978년부터 2005년까지 27년을 재임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재직하는 동안 한반도 통일문제와 이북의 가톨릭 실상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며 그에 따른 대북인식과 사목열정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폴란드출신의 교황은 유년시절 독일과 소련에서 어렵게 자랐기 때문에 단지 이념과 사상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소신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교황청에서 남측 인사들을 접견할 때마다 “남북 관계의 정상화와 이북의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라며 자주 언급했고 사목적 공식 기도 외에도 북을 위한 구체적인 기도를 홀로 드렸다. 대표적으로 81년 2월의 메시지에 “나는 사랑하는 이북의 형제자매들도 항상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했고, 81년 10월에는 “근황을 알지 못하는 이북 신도들에게 인사를 전하며, 그들의 양심에 따라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라고 기도제목을 공개했다.

1982년에는 10월 1-24일까지 로마에서 공연 중이던 평양곡예단측이 교황 알현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타진해 20일에 맞춰 접견이 주선되었으나 웬일인지 곡예단측은 사전통보 없이 불참했던 적이 있었다. 이때 교예단을 접견할 때 말하려던 “30년이상 분단된 한반도에서 특히 인도적 분야에서 대화가 이뤄져 수많은 이산가족이 재결합하여 그들의 아픔과 슬픔이 종식되기를 기도합니다”라고 했으며, 84년 방한시 전두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도 남북 이산가족이 겪는 고통과 문제 해결을 위해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남북 통일 문제에 관한 교황의 관심은 매우 남달랐다.

북측에 다시 가톨릭 공동체가 조직되고 성당이 세워지기까지는 이처럼 교황의 기도와 지도력이 컸으며 그렇게 되기까지는 교황 가까이에 장익 신부가 있었기에 모든 것이 가능했다. 장 신부는 1963년 3월 사제서품을 받고 76년에 서울대교구장이던 김수환 추기경의 비서실장을 지냈고 서강대 신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78년부터 85년까지 ‘교황청 종교대화 평의회 자문위원’으로 바티칸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교황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해서 1978년에 제 264대 교황에 오른 ‘요한 바오로 2세’는 선종할 때까지 무려 26년 동안을 장 신부와 끈끈한 인연을 맺었으며 이로 인해 교황과 김 추기경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장 신부가 남북을 종횡무진하며 교황의 대북사역 메신저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수 있었다.

생전시 기도하고 있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최재영
생전시 기도하고 있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최재영
1984년 5월 3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전두환대통령의 영접을 받는 모습. ⓒ최재영
1984년 5월 3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전두환대통령의 영접을 받는 모습. ⓒ최재영

 

2. 남측 가톨릭 주교회의가 직접 발족한 ‘북한선교위원회’의 역할

남측 가톨릭은 1982년 12월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산하 ‘북한선교부’를 출범시키며 최초로 대북사역을 구체화했다. 이후 기념사업위원회가 해체된 후에는 주교회의 직속기구 산하 ‘북한선교위원회’로 개편했고, 1985년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주교회의가 앞장서 ‘북한선교위원회’를 정식 발족했다. 주교회의는 8월 30일, 명동성당에서 공식후원회를 성대히 개최했는데 다음 날에는 이를 두고 북에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함으로써 남과 북의 종교적, 이념적 간극을 실감케 했다. 31일 북측 로동신문에는「종교의 탈을 쓴 반공 광대놀음」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으며 그 내용은 “남조선 가톨릭 교계에 최근 대북선교후원회라는 것이 조직됐으며 이는 종교를 이용하여 우리 공화국을 사상 문화적 침략을 꾀하는 미제의 상투적 수법”이라며 강하게 비판을 가했다.

이처럼 남과 북이 팽팽하게 대립한 가운데 ‘북한선교위원회’가 발족함으로써 긴장감속에서 대북사목이 보다 더 다각적이고 전략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또한 기념사업위원회를 주관하던 김남수 주교는 대북선교활동에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1984년 7월, 당시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담당하는 고종옥 신부의 최초 방북을 계기로 고 신부를 천주교 ‘북한선교위원회 해외활동위원’으로 위촉했고 연이어 미국 뉴저지에서 교포사목 중인 박창득 신부도 위촉했다. 고 신부는 그후 재방북해 1991년 3월 28일 장충성당에서 부활대축일 미사를 봉헌했다.

박창득 신부는 1980년과 84년대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해 백두산 등정을 하며 대북사목의 가능성을 타진했고, 1989년 2월에는 미주 한인신자들과 함께 평양을 방문해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신자 합동미사’를 장충성당에서 봉헌했다. 그 후에도 박 신부는 평양교구장 서리 김수환 추기경의 뜻에 따라 30여 차례 북을 방문하며 장충성당에 성모상을 모시기도 했고, 때로는 장충성당에서 ‘성령쇄신 세미나’를 열었으며 1995년 10월 27일, 북측 교우들을 미국에 초청해 ‘남-북-미주 동포 신자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또한 96년과 98년 부활절에도 평양을 방문해 서울 명동성당-평양 장충성당-미국 오랜지 성당을 잇는 3자 동시 부활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방북 직후 자신이 담당하는 성당 미사에서 성만찬식을 베푸는 고종옥 신부. ⓒ최재영
방북 직후 자신이 담당하는 성당 미사에서 성만찬식을 베푸는 고종옥 신부. ⓒ최재영
바티칸을 방문한 박창득 신부가 교황을 접견하는 모습. ⓒ최재영
바티칸을 방문한 박창득 신부가 교황을 접견하는 모습. ⓒ최재영

3. 가톨릭 사제로서 분단 이후 최초로 방북한 고종옥 신부

1984년 3월, 북미주 교포사목을 하던 고종옥(마태오) 신부는 이산가족 상봉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전격 방문했다. 실향민으로서 헤어진 가족을 만날 명목으로 방북했으나 교회사적으로는 휴전 후 최초로 북을 방문한 사제가 된 것이다. 그는 방북 직후 5월에 서울교구를 방문해 방북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명목상으로는 아직 평양에 가톨릭성당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예상과는 달리 북측 당국은 가톨릭 사제인 나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로써 남측 가톨릭은 고 신부를 통해 북측 당국과의 접촉 가능성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기도 개풍군에서 태어난 그는 성장할 때까지 고향인 개성 여현에서 부모의 농삿일을 돕던 중 해방과 동시에 38선이 마을 한 가운데를 가로 지르며 설치되는 비극을 경험했다. 평화스럽던 고향 마을에는 남북의 경비병들이 서로가 밤마다 쏘는 총소리 때문에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고 아침이 되면 가마니에 덮인 시신들이 즐비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그는 두려움과 함께 인생무상과 삶의 회의에 빠져 마침내 고향을 떠났다.

여러 우역곡절 끝에 파리로 건너가 신학교를 졸업한 후 사제가 된 그는 첫 임지로 캐나다 퀘벡주의 몬트리얼 성당 보좌신부로 발령을 받았고, 그후 카나다에서 한인성당들을 세우는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다. 그리고 1984년에 자신이 떠난 고향 땅을 40년만에 찾게 되었다. 평소 여러 권의 책을 낸 작가 출신의 고 신부는 6.25 전쟁당시 국군으로 참전해 전투임무를 수행하던 중 부상당한 미군 비행사와 인민군을 놓고 양측 모두 살릴 수 없었던 복잡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간증하기도 했다.

“두 명 모두 살려 낼 수 없었던 절박한 상황 아래 나는 우리와 피를 같이 나눈 동족을 선택했다. 이 인민군은 우리와 같은 조상과 언어와 문화를 갖고 있는 동족이며, 우리가 통일시켜야 할 조국의 아들인 동시에 또한 우리의 형제입니다. 작전장교님,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상은 변할 수 있어도 그 몸에 흐르고 있는 피는 영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또한 내 피 속에 흐르고 있는 내 민족에 대한 양심이었습니다. 나는 결국 전우였던 미군에 대한 의리보다 ‘피’ 라는 내 양심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최초의 방북 후 서울교구에서의 보고를 마친 고 신부는 그후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해 9월 프랑스 파리로 가 2년동안 본격적인 대북 파송훈련과 임무 수행준비에 들어갔으나 87년 1월 8일자로 미국 산호세 한인천주교회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명절마다 한복을 입고 갓을 쓴 채 미사를 드린 것으로 유명한 고 신부는 북을 방문하고 돌아 온 이후 ’43년만의 귀향’이라는 책을 써 실향민들의 공감을 얻었고 남북화해와 협력을 위해서도 노력하던 중 2004년에 향년 75세로 선종했다.

1984. 6.14 몬트리올을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 환영만찬장에서 추기경과 고종옥 신부(우측 두 번째). [사진제공: 백젬마 교우]
1984. 6.14 몬트리올을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 환영만찬장에서 추기경과 고종옥 신부(우측 두 번째). [사진제공: 백젬마 교우]
김 추기경과 고종옥 신부가 환담을 나누는 장면. [사진제공: 엄준교 그레고리오 교우]
김 추기경과 고종옥 신부가 환담을 나누는 장면. [사진제공: 엄준교 그레고리오 교우]

 

4. 지학순 주교와 강성숙 수녀가 평양에서 드린 최초의 미사

고 신부에 이어 이듬해인 85년에는 신구교를 막론하고 한국 교회사에 큰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다. 85년 9월, 남북간 공식합의에 따른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이 평양을 방문하던 사흘째 되던 9월 22일 주일날, 아직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 이른 새벽이었다. 새벽 5시와 6시 10분에 각각 개신교와 천주교가 사이좋게 한 공간에서 예배와 미사를 드린 것이다. 방문단 숙소로 사용 중인 고려호텔 3층에 있는 제1영화관에는 기독교신자와 천주교신자들이 하나 둘씩 몰려들기 시작했다. 남측에서 올라간 황준근 목사와 지학순 주교에 의해 드려지는 분단 이후 최초의 예배와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이 당시는 평양에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이 세워지기 훨씬 전이었기 때문에 남측에서 올라간 이 두 성직자가 드린 종교의식은 분단 40년만에 최초로 드린 공식 미사와 예배였다. 지 주교는 네 살 아래 누이동생 지용화씨를 만나기 위해 왔고, 황 목사는 어머니 조희영씨를 만나기 위해 왔기 때문에 이들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자격으로 방문한 것이지만 그들이 드린 종교의식만큼은 사적, 공적 의미를 떠나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다.

영화관 단상에는 서울에서 미리 준비해간「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주일예배-1985. 9. 22 평양」이라고 씌어진 현수막이 내걸렸고 김상협 대한적십자사총재, 홍성철 국토통일원장관(고향방문단장)도 설레임으로 앞자리에 앉았으며 50여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자리를 메웠다. 이들은 주로 이산가족 방문단원들이나 예술단 단원, 취재를 위한 기자들이었으며 북측에서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새벽 5시가 되자 황준근 목사가 먼저 개신교 예배 집례를 시작했고 1시간이 지난 후인 아침 6시 10분부터는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미사를 집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예배는 황준근목사의 집례로 시작돼 박인각 장로의 대표기도 후 창세기 27장 41∼45절의 성경본문으로 황 목사가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비유로 ‘만남과 이별’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으며 예배가 끝난 뒤에는 곧바로 개신교식 성찬예식을 가졌다.

개신교 예배가 끝나고 아침 6시 10분이 되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의 집전으로 분단 40년 만에 북에서 드리는 첫 미사가 시작됐다. 마침 이날은 ‘103위 순교성인 시성식’ 1주년을 기념하는 축일미사인 ‘한국순교성인대축일’로 드려졌다. 감격에 겨운 지 주교는 해방 이후 6.25 전쟁을 전후해 북에서 체포돼 죽음을 맞이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희생으로 머지 않아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오기를 염원하며 강론을 펼쳤다.

“1945년 해방직후 많은 성직자들이 체포돼 목숨을 잃은 평양에서 역사적인 미사를 집전하게 되어 무엇보다 의미가 깊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 땅에 머지 않아 평화가 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나 자신도 어제 37년만에 여동생을 만났으나 벌써 가까운 친척 일곱 분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분단의 아픔은 말로 표현할 길 없지만 냉엄한 역사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민족과 나라를 위해 그리고 조국통일을 위해 신자로서 희생하고 봉사하는 생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강론에 앞서 기도문을 읽던 중 순교자들의 희생 대목이 나오자 지 주교는 너무 감격에 복받쳐 기도를 이어가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참석한 신자들도 함께 따라 우느라 2분 동안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장내는 숙연한 가운데 복받쳐 오르는 애통함으로 눈물바다를 이뤘다. 특히 지 주교는 전날 고려호텔 면담실에서 37년만에 누이동생 용화(당시 61세)씨를 비롯해 사촌형님과 조카들을 상봉했는데 그 곱던 누이의 얼굴은 오빠인 자신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 같아 서글펐다고 했다. 분단이 앗아간 것은 세월만이 아니었다. 35년 만에 만난 두 남매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이에 감정이 정리될 무렵, 누이동생은 가톨릭 고위 성직자인 오빠를 향해 난데없는 말을 던졌다.

“오라버니, 우리 공화국이 바로 천당인데 또 어디에서 천당을 찾겠다는 거야요?”

두 남매가 지닌 역사인식에 대한 간극과 이념적, 종교적, 정서적 차이는 주름살만큼이나 깊은 것임을 알 수 있는 일화였다. 특히 지 주교와 함께 방문했던 가톨릭 성직자 중에는 해방전부터 평양에서 활동하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강성숙 수녀도 포함돼 있었다. 마침 강 수녀가 근무하던 수녀회측에서는 현재 장충성당 자리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선교리 성당 분원을 세웠다. 지 주교와 강 수녀가 드린 평양에서의 첫 미사는 결코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지학순 주교가 여동생 지용화씨를 첫 상봉하는 장면. ⓒ최재영
지학순 주교가 여동생 지용화씨를 첫 상봉하는 장면. ⓒ최재영
지학순 주교가 평양을 떠나며 여동생과 헤어지는 장면. ⓒ최재영
지학순 주교가 평양을 떠나며 여동생과 헤어지는 장면. ⓒ최재영
지학순 주교에 의해 드려진 최초의 미사 장면을 보도한 가톨릭신문 1면. ⓒ최재영
지학순 주교에 의해 드려진 최초의 미사 장면을 보도한 가톨릭신문 1면. ⓒ최재영
평양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서 근무한 강성숙 수녀가 헤어진 가족 두 명을 만나는 장면. 6.25전쟁 당시에도 장충성당이 있는 자리에 수녀회 분원이 있었다. ⓒ최재영
평양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서 근무한 강성숙 수녀가 헤어진 가족 두 명을 만나는 장면. 6.25전쟁 당시에도 장충성당이 있는 자리에 수녀회 분원이 있었다. ⓒ최재영
황준근 목사가 모친 조영희씨를 첫 상봉하는 모습. ⓒ최재영
황준근 목사가 모친 조영희씨를 첫 상봉하는 모습. ⓒ최재영

 

5. 장익 신부의 평양 ‘비동맹특별각료회의’ 참석과 역할

지학순 주교와 강성숙 수녀가 평양 고려호텔에서 첫 미사를 드린 이후, 서울에서는 ’86 아시안게임’이 성대하게 끝났고 이듬해인 87년에 접어들자 북측은 보다더 대외적인 활동 범위를 넓히고자 바티칸과 모종의 접촉을 시도했다. 1987년 6월 9일-13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될 ‘비동맹 특별각료회의’에 바티칸 대표단의 참석 가능성을 조용히 타진한 것이다.

이에 교황청은 당시 제네바 유엔기구 교황청사절단 고문으로 있던 ‘주세페 베르텔로’ 몬시뇰 주교를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남측 가톨릭과의 협의 후 당시 서울대교구 사목연구실장을 맡고 있던 장익 신부도 함께 파견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북측은 1975년도 8월 리마(Lima)의 비동맹 외무장관 회의에서 당시 월맹과 함께 회원국으로 가입된 이후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최고조로 발휘하던 시기였다. 이에 남측정부도 질새라 비동맹 국가에 대해 적극적인 방문, 초청외교를 벌이며 북에게 밀리지 않으려 외교전을 펼쳤던 시기였다. 결국 두 성직자를 옵저버 자격으로 파견한 교황청의 이같은 조치는 마침내 로마 바티칸과 북측 당국간의 최초의 공식접촉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에 대한 김수환 추기경의 회고를 잠시 들어보자.

“당시 바티칸에서 평양 비동맹 국제회의 참석 타당성에 대한 의견을 내게 물어왔을 때 ‘무조건 가야 한다’고 해서 가게 된 것이다. 장익 신부가 비동맹국가 각료회의를 마치고 북측이 보낸 나의(김 추기경)의 방북 초청장을 갖고 돌아왔다. 남측 정부 당국도 그 초청 건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그후 장충성당 헌당 축성식을 겸해 나의 방문일정을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장익 신부와 정의철 신부가 평양에 갔는데 북측에서 막판에 문제를 제기하며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평양교구장을 맡고 있던 나의 평양방문이 흐지부지됐다.”

아무튼 북측은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비동맹 국제회의를 두고 바티칸측과 접촉했던 것이고, 바티칸은 이 문제를 두고 남측 가톨릭측과 심도있게 상의를 했으며 결국 나흘에 걸쳐 개최된「남남협력에 관한 비동맹특별각료회의」가 순조롭게 마쳐지게 됨으로써 전략적 차원의 대북선교 접근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장 신부가 1987년 6월 9일-13일까지 개최된 평양 비동맹회의를 마친 직후인 8월 18일에는 유엔가입문제로 남북이 유엔과 국제사회에서 팽팽하게 대결한 사건이 발생했고 연이어 11월 29일에는 KAL 858편 여객기 폭발사건으로 남북이 적대적 관계에 빠져든 상황이 되었다. 아무튼 옵저버로 참가한 교황청 대표단의 방북 결과에 힘입어 1년 후에는 북 최초의 가톨릭 단체인 ‘조선천주교인협회’가 결성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장익 신부와 함께 평양에 간 '주세페 베르텔로' 대주교의 최근 모습. 그는 현재 바티칸 시국 총리에 재직 중이다. ⓒ최재영
장익 신부와 함께 평양에 간 ‘주세페 베르텔로’ 대주교의 최근 모습. 그는 현재 바티칸 시국 총리에 재직 중이다. ⓒ최재영
장익 주교의 최근 모습. ⓒ최재영
장익 주교의 최근 모습. ⓒ최재영

 

6. ‘조선기독교도련맹’ 목사들의 도움으로 가톨릭 풀뿌리 신자들 최초 발굴

바티칸 라인을 통해 북측 당국과 직접적인 가교역할을 한 인물은 바로 장익 신부였다. 평양 비동맹 특별각료회의 대표단 2인 중에 한 사람인 장 신부는 나흘간 개최된 바쁜 회의 일정 중에도 틈을 내 평양에 있는 ‘조선기독교도연맹’ 관계자들을 만났다. 천주교 사제가 개신교 단체를 찾을 수 밖에 없던 이유는 당시에는 공식적인 천주교 단체나 커뮤니티가 없었기 때문에 천주교는 명목상 기독교연맹 산하에 예속돼 있었던 이유 때문이었다.

장 신부는 기독교련맹 관계자들과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하며 현존하는 북의 가톨릭신자들에 대한 근황 파악을 요청했고 더불어 가급적이면 신자들을 만나고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천신만고 끝에 다섯 명의 천주교 신자들과 연맹사무실에서 감격적인 만남이 성사됐다. 연맹 목사들의 도움으로 장 신부와 상봉한 다섯 명의 신자들은 남성신자 3명과 여성 신자 2명이었으며 모두 자신들의 영세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김승렬(야고보), 마등룡(바오로), 윤봉순(모이세), 박덕수(말구), 홍도숙(데레사) 등이었으며 휴전 후 처음으로 대면한 장 신부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날 나타난 김승렬(야고보)은 약 60세 가량 된 남성으로 강원도 고산에 있는 천주교 공소(사제가 없는 시골 성당)회장의 아들로서, 농과대학 출신의 원예가였으나 지금은 은퇴한 사람이며, 마등룡(바오로)은 중국 연길의 간도 태생의 명월구 해성학교 출신으로 신부에게 영세를 받았다고 했으며 62세쯤 되어 보였다. 윤봉순(모이세)은 강 신부에게 자주 다녔다고 했으며, 농부 출신으로 60세쯤 되었다. 박덕수(말구)는 약 60세 가량으로 이 사람도 연길의 간도 출신으로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시 공원에서 일을 하다가 은퇴했다. 홍도숙(데레사)은 박덕수의 아내로써 약 55세 가량 되었으며, 평북 피현 출신인데 어려서는 중국에서도 살았다고 했고 한 신부와 잘 아는 것 같았다.”

감격스런 마음과 의아한 마음이 교차된 장 신부는 이들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6.25전쟁 이후에도 각자 그들 나름대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영위해 왔음을 확인했다.

“나는 서로 반갑다는 인사를 나눈 뒤 그동안 어떻게들 지냈느냐고 물으니, 나에게 ‘전쟁시 미군 폭격으로 모든 성당이 파괴되고, 교우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이래, 각자 가정에서 또는 개인으로서 형편되는대로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말했다. 조만과(早晩課, 신자들이 아침과 저녁에 바치던 조과(早課)와 만과(晩課)를 통칭)와 삼종경(三鍾經, 삼종기도)은 여전히 바치고 있었고, 주일이면 주모경(主母經,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합한 말) 서른 세 번으로 대송하며, 첨례표(瞻禮表, 교회력에 따른 중요한 축일을 한 장으로 기록한 표)가 없어 이동 대축일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짐작하여 그 전날 대재(大齋, 절제와 극기를 지키는 단식재)를 지킨다고 하였다. 박말구와 홍 데레사 부부는 큰 참례를 그냥 보내기가 너무 허전하여 둘이서 옛부터 외워오던 라틴말 성가를 함께 부르기도 한다고 했으며, 윤 모이세 농부는 신공책(神功冊, 교리서와 함께 신자들의 신앙 기본 지침서)도 아무것도 없고 그저 벽에 걸린 십자고상 하나만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였다.”

본래 평양과 평안남북도 지역을 관할하는 평양교구에는 20여 개소의 본당이 있었지만 해방 직후 6.25전쟁을 거치며 모두 사라졌고 그런 황폐한 조건에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다는 것에 대한 경외감마저 들었던 장 신부는 귀국 후 김수환 추기경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모두 보고했으며 이때 자신이 각별하게 느낀 점도 언급했다.

“평양에서 신자라고 밝힌 여러 명들 중에 그들 모두를 신자라고 믿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으나 박덕수와 홍도숙 두 내외는 틀림없는 가톨릭 신자같이 보였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이듬해인 1988년에 평양에는 최초로 ‘조선천주교인협회’가 결성되고 장충성당이 건립됐다는 소식을 접한 김 추기경은 여러 경로를 통해 남측 사목자들을 장충성당에 파견하려는 목적을 두고 백방으로 알아봤으나 결과는 허사였다.

“나는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북한대사관 대사에게도 ‘장충성당에는 신부가 상주해야 참다운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해주면서 우리가 파견할 신부 2명과 수녀 3명의 구체적인 명단과 자료까지 넘겨주었다. 그러나 북측의 답변을 손꼽아 기다렸으나 끝내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

이처럼 장 신부의 모험에 가까운 용단에 의해 성사된 가톨릭신자 면담은 교회사적으로 대단한 사건으로 기록될만 했다. 미국과의 적대적 상황하에서 북측의 초기 인민정부는 종교를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한 도구로 보았고 이에 따라 종교에 대한 정책을 양성화하지 않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이날 장 신부가 북측의 신자들을 발굴해 면담한 사건을 계기로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조용히 신앙생활하던 잠재적 가톨릭 신자들의 활약은 더 구체화되고 공식화되었으며 북측 정부로부터 공인받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7. 바티칸 부활절미사 참석 후 교황을 알현한 북측 가톨릭 신자 부부

한편 교황청으로 돌아간 장 신부는 북에도 참된 가톨릭신앙의 그루터기가 남아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교황께 보고했고, 이를 계기로 이듬해 4월에 이들 신자들을 바티칸으로 초청하게 된다. 교황청은 88년 4월 바티칸에서 거행되는 부활절 대축일 전례에 북측 신자 내외를 초청한 후 미사와 전례를 통해 고해성사를 하게 하고 영성체를 받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박덕수와 홍도숙 부부는 전후 최초로 바티칸을 방문하는 기록을 세웠으며 이어서 장익 신부의 주선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직접 알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 날 촬영한 교황 알현 기념사진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장충성당 제의실 벽면에 걸려 있을 정도로 이북의 가톨릭 공동체 신자들은 교황에 대해 존경심을 지니고 있고 가톨릭신앙을 얼마나 갈급해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줬다.

8. 바티칸 ‘우르바노 신학교’에 입학한 북측 가톨릭 신자

1988년 4월, 부활절 행사에 참석해 교황을 알현한 부부는 며칠 후 또 다시 이북의 가톨릭 역사에 기록될 만한 주인공이 됐다. 교황청의 특별 배려와 북측의 승인으로 박덕수(마르코), 홍도숙(테레사) 내외는 곧바로 본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로마에 계속 남아 신학교에 유학하게 된 것이다.

홍도숙의 남편인 박 마르코는 신학교를 다니고 부인 홍 테레사는 남편의 유학을 뒷바라지했다. 박 마르코는 교황청에서 설립한 명문 ‘우르바노 대학교(Pontificia Universita Urbaniana)’에 입학해 공부하게 됐으나 박 마르코가 북 최초의 가톨릭 사제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 입학한 것은 아니었다. 이 부부는 여러 가지 사정과 학업에 대한 어려움으로 인해 입한한 지 채 1년이 안돼 본국으로 돌아가게 됨으로써 학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 북의 우방인 중국은 평소 자체적으로 주교를 임명했는데 이를 두고 교황청과 갈등을 겪고 있었으며 중국은 이를 두고 바티칸의 내정간섭으로 규정해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북은 중국보다 훨씬 자주성에 민감하기 때문에 북에 상주할 사제는 남측이나 외국 출신으로 임명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북측 토종 신자 중에 사제 후보생을 뽑아 신학교에 입학시켜 사제로 서품받게 하는 방법밖에 없다. 박덕수의 신학교 입학에 대해 기대를 많이 했으나 결국 중도 포기된 이후 지금까지 북측 신자가 가톨릭 신학교에 입학한 사례는 공식적으로 보이지 않고 있다.

9. 북측 정부와 신자들이 직접 결성한 ‘조선천주교인협회’

장익 신부가 조선기독교연맹을 통해 북측 가톨릭신자들을 면담한 이래, 일련의 여러 과정을 통해 북의 풀뿌리 가톨릭 신자들은 고무되기 시작했고 부부의 교황청 방문 두 달 후인 88년 6월 30일에는 드디어 전후 최초의 가톨릭신자 단체가 출범하게 됐다.

북에서 네 번째로 결성된 종교단체라서 늦은 감이 있었으나 해방 직후 북측 인민정부와 가톨릭이 겪었던 갈등과 대립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조선천주교인협회’라는 이름으로 조직된 이 단체가 출범하기까지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한 결과였다. 1987년 10월부터 이 협회의 출범을 준비하는 ‘결성준비위원회’가 조직됐으며 9개월간의 준비작업 끝에 이날 발족된 것이었다.

1987년 10월 2일엔 신도회 차성근(율리아노) 회장의 주관으로 60여 명의 신도들이 모여 신공을 드리고 평양 장충성당의 창건을 공포한 것이 ‘협회 결성 준비위원회’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그동안 ‘조선기독교연맹’ 산하에 있었던 천주교신자들은 이때부터 독립된 천주교 단체를 갖게 된 것이다. 당시 평양방송은 “천주교인들의 자유와 권익을 보호하며, 다른 나라 천주교인과 단체들과도 친선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하고자 협회를 결성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전국적인 조직으로 구성된 3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조선천주교인협회’가 태동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이 협회는 북의 천주교를 대표하면서 대내외 창구 역할을 해 왔고 출범하자마자 장충성당을 완공하는 등 맹활약을 해오다가 10여년이 흐른 1996년 6월에 ‘조선카톨릭교협회’로 개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 신자들의 손으로 장충성당을 직접 건축하다

장충성당 건축은 ‘조선천주교인협회’가 출범될 무렵부터 추진되기 시작했다. 국가에서는 개신교 봉수교회당과 칠골교회당을 건축할 때처럼 성당 부지와 건축 자재를 무상으로 공급했다. 협회에 소속한 천주교 신자들은 신도회 차성근 회장의 모범적인 지도 아래 1988년 3월에 착공식을 해 같은 해 9월 말에 모든 공사를 마치고 6개월만에 완공했다. 이렇게 해서 대동강 동남측 동평양지역의 주거지역에 터를 잡은 성당은 총 부지 면적 2,000m², 건평 1,852m² 규모로 1, 2층 모두 합해 총 250석 규모로 지어졌다.

성당 건축비용은 당시 북 화폐로 20만원이 지출됐으며 협회에 속한 3백여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헌금 10만원과 정부에서 대여금 명목으로 지원한 10만원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성당은 기둥에 의한 내부 공간의 분절이 없는 강당형으로 설계되어 시원한 맛을 주었으며 제단과 회중석, 성가대석, 제의실, 고해소는 물론 감실까지 고루 갖췄고 각종 성화와 성물 등도 여기저기 제 자리에 비치돼 있었다. 전면 중앙 출입구를 아치탑 형태로 강조하고, 외벽은 매 칸마다 기둥과 아치창으로 설계했다.

처음 건축 당시에는 성당내부 제단 정면에 양떼를 거느린 예수님의 전신상이 걸려 있었으며 왼편에는 성모상이, 오른편엔 요셉과 어린 예수가 그려진 성화가 모셔져 있다. 제단 정면에 모셔진 성화는 당시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 온 젊은 화가가 노련한 솜씨의 유화로 그린 것이다. 또한 양 벽면엔 예수의 14처 성화가 순서대로 걸려 있었으며 본당 출입문 가까이에는 하얀 커텐으로 드리워진 고해성사대가 설치돼 있었다. 사제가 없는 성당의 고해성사대는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기다리는 듯 했지만 왠지 모르게 썰렁해 보였다.

항간에 남측 보수우익들에 의해 떠도는 말에 의하면 ‘장충성당은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할 신자들을 위해 급하게 세운 것이며 국제사회 선전용으로 건축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국제행사와 타이밍이 맞물린 것은 사실이지만 장충성당은 평양주재 외국인들과 관광객들 중에 가톨릭을 믿는 신자들을 위해 건립되었으며 동시에 북 내부적으로 그 동안 흩어졌던 풀뿌리 가톨릭 신자들을 새롭게 규합해 공식화하려는 본래의 취지에 맞게 지어진 것이다.

건축 당시나 지금이나 장충성당은 사제와 수녀가 상주하지 않아서 신도회장이 직접 공소예절을 인도하고 있으며 이때 두 명의 복사를 두고 집전한다. 최근에는 정확히 70여 명의 신도가 평균적으로 참석하고 있으며 설립당시의 미사 시간은 매주 주일 오전 9시, 10시, 11시 세 차례 드려졌으나 현재는 오전 10시 정각에 단 한 번만 드려진다.

한 겨울에 찍은 장충성당 풍경. ⓒ최재영
한 겨울에 찍은 장충성당 풍경. ⓒ최재영
장충성당 신자들이 주일 미사를 드리는 모습. ⓒ최재영
장충성당 신자들이 주일 미사를 드리는 모습. ⓒ최재영
꽃피는 봄에 찍은 장충성당 사제관과 부속건물들. ⓒ최재영
꽃피는 봄에 찍은 장충성당 사제관과 부속건물들. ⓒ최재영
장익 신부와 함께 장충성당 첫 봉헌 미사를 드린 정의철 신부. ⓒ최재영
장익 신부와 함께 장충성당 첫 봉헌 미사를 드린 정의철 신부. ⓒ최재영

 

장충성당 첫 봉헌미사를 드린 장익, 정의철 신부

장충성당은 남측이 주도한 남북 천주교 교류와 함께 이에 따른 바티칸의 지원과 포용정책 그리고 이북 자체내의 종교정책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북측은 장충성당이 88년 9월말에 완공되자마자 바티칸측에 통보했고 바티칸은 이를 승인하고 봉헌 축성식을 거행하는 의미에서 평양에 교황 특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988년 10월말, 천주교 서울대교구 장익 신부와 당시 로마에서 유학중이던 정의철 신부가 특사로 임명됐다.

두 신부는 로마를 경유, 평양에 도착해 열 흘간 머물며 북측 당국과 조선천주교인협회 간부들과 연속 회담을 가지며 천주교의 남북 교류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를 펼쳤으며 10월 30일과 11월 1일 양일에는 드디어 성대하면서도 소박한 봉헌 축성미사를 집전했다. 60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봉헌 미사는 입당성모의 노래, 천주경, 영성체, 순교자 찬가 순으로 진행됐다.

또한 이에 앞서 두 남측 신부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장충성당 신자들에게 보내는 성물들을 전하는 별도의 시간을 가졌다. 교황이 보낸 성물들은 차성근 율리아노 신도회장이 신자들을 대표해 수령했다. 품목들은 성작, 성합, 성서, 전례서, 성가집 등이었고 지금도 이 성물들은 장충성당에 고이 보관되며 사용하고 있다.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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