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6.

북한은 올해 1월 조선노동당 제8기 제6차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김일성 주석 탄생 110돌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탄생 80돌을 “승리와 영광의 대축전”으로 “성대히 경축”하겠다고 하였다. 통일의 상대방인 북한이 국가 차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계기에 대해 우리도 학술적으로 자세히 연구하는 게 통일을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주권연구소와 자주시보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기획연재를 10회에 걸쳐 준비하였다. 

 

 


 

 

 

 

 

2. 김일성 주석, 폐허에서 사회주의 공업화를 추진하다

 


“북한 땅 위에 서 있던 것은 남김없이 쓰러졌다. 북한은 이제 석기시대로 돌아갔다.”

한국전쟁 때 미국 전략공군사령관이었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 융단폭격을 자랑하며 남긴 말이다.

전쟁 기간 평양에는 43만 발의 폭탄이 떨어졌고, 북한 전역에 1제곱킬로미터 당 18개의 폭탄이 퍼부어졌다. 1953년 4월 말까지 미군은 26만 발의 중대형 폭탄, 2억 발의 탄환, 약 40만 발의 로켓탄, 약 150만 발의 네이팜탄을 쏟아 부었다. 이것은 태평양전쟁 중에 미국이 사용한 전체 폭탄 양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 결과 북한 전역은 폐허가 되었다. 특히 평양은 형체가 온전히 남아 있는 집을 찾기 힘들 지경이었다. 산업 기반도 무너졌다. 37만 정보의 논밭이 피해를 입었고 9만 정보의 경지면적이 줄어들었다. 8천7백 개의 공장이 파괴되어 공업생산이 1949년의 64%로 떨어졌다. 

이처럼 해방 후 8년, 정부 수립 후 5년 만에 북한이 맞닥뜨린 현실은 참혹했다. 당시 내각 수상이었던 김일성 주석은 폐허가 된 북한을 어떻게 일으켜 세울 것인가라는 무거운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물론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원조가 있었다. 이 원조가 한때 북한 전체 예산의 34%에 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55년 4월 소련은 자국을 방문한 김일성 주석에게 경제 건설 방향을 중공업 우선정책에서 경공업 중심으로 전환하라고 요구했다. 소련은 자신들이 ‘사회주의 종주국’이기 때문에 소련이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제정책을 지휘하는 ‘사회주의 국제분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김일성 주석은 ‘사회주의 국제분업’을 자주권 침해로 규정하며 가입을 거부했다. 이에 소련은 원조를 줄여 북한을 압박했다. 결국 1958년에 이르러서는 원조가 전체 예산의 4.5%까지 축소되었다. 따라서 외부에 의존하는 전후 복구는 불가능했다. 

김일성 주석은 자신의 철학인 ‘주체사상’에서 답을 찾았을 것이다. 주체사상에 따르면 ‘혁명과 건설의 주인이며 자연을 개조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결정적 요인은 인민대중’이기 때문에 외부의 도움이 아닌 ‘인민대중’의 힘으로 전후 복구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투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사상의식’이기 때문에 물질적 조건보다 사상적 준비에 먼저 힘을 집중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것이 ‘천리마운동’이다. 

천리마운동

김일성 주석은 1956년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연설 「사회주의 건설에서 혁명적 대고조를 일으키기 위하여」에서 당 간부들에게 군중 속에 깊이 들어가 대중의 창발성을 최대한 발동시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기한 내에 완수하자고 제기하였다.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천리마운동’ 항목) 

그리고 12월 28일 직접 강선제강소(현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를 찾아가 노동자들에게 현재 나라 형편이 매우 어렵다며 “동무들이 다음해에 강재(주로 토목, 건축 분야에서 거대 구조물을 만들 때 사용하는 철강 재료)를 1만 톤만 더 생산하면 나라가 허리를 펼 수 있습니다”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강선제강소 분괴압연직장 노동자들은 6만 톤 생산능력의 기계로 9만 톤 생산을 다짐했고 이듬해 무려 12만 톤의 강재를 생산했다. (김진환, 「천리마운동 : 건설의 신화와 재현의 정치」, 『북한연구학회보』 제20권, 북한연구학회, 2016.)

이렇게 시작한 천리마운동은 북한 전역에 퍼지며 노동자, 농민 등 근로자의 노력경쟁을 고조시켰으며 대중적 운동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특히 평남 청년탄광돌격대, 강계 청년발전소돌격대, 청년철도건설돌격대 등의 모범이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천리마운동은 195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전국생산혁신자대회를 계기로 북한 전체 근로자의 노력경쟁운동으로 본격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 주석은 주요 산업 현장을 현지지도하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7년 1월 3일 김일성 주석은 황해제철소(현 황해제철연합기업소, 아래 황철)를 현지지도하였다. 황철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폭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어 가동이 중단되었다가 전후에 제강직장과 조강직장이 먼저 복구되었다. 그러나 제1호 용광로와 해탄로(석탄을 넣고 가열하여 코크스를 만드는 가마)는 1957년까지도 가동 불능 상태였다. 김일성 주석의 황철 현지지도로 제1호 용광로와 해탄로 복구사업은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그 결과 1958년 4월 30일 조업식을 하게 된다. 

김일성 주석은 조업식 연설에서 “당은 우리의 노동계급이 애국적 열성과 무궁무진한 창조적 재능을 발휘하여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이 어려운 공사를 기한 전에 능히 완성하리라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영웅적 위훈으로써 당의 기대에 훌륭히 보답하였습니다”라며 노동자들을 치하하였다. 

또 “용광로 건설과정에서 수많은 노력영웅들과 노력혁신자들이 나왔습니다”라면서 제관공 원도중과 연공 임창호 등이 “겨울에 높이 60미터나 되는 높은 곳에서 모진 추위를 무릅쓰고 2개월 동안이나 작업하였으며 용광로의 노정설비를 지상에서 조립하여 올리는 것과 같은 놀라운 창발성을 발휘”한 사례, 축조공 홍도관 등이 “1만 1,000톤에 달하는 막대한 양의 내화벽돌을 축조하였으며 선진기술에 기초한 새로운 해탄로건설에 성공”한 사례, 용접공 최윤명, 리문관 등이 “낡은 용접방법을 버리고 대담하게 선진용접방법을 적용함으로써 공사기일을 3분의 1로 앞당기는 커다란 공훈”을 세운 사례 등을 열거하였다. 

그러면서 “설계로부터 기계설비의 제작과 그 시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업이 다 우리 노동자들과 기술자들 자신의 손에 의하여 진행”되었으며 연구를 통해 “완전히 선진기술에 기초하여 새롭게 설계”되었다고 강조하였다. (이상 강호제, 「에피소드로 본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 6. 자체의 힘으로 복구한 황해제철소」, 2020.4.7.)

1958년 기양기계공장(현 금성뜨락또르공장)의 트랙터 개발 과정도 유명하다. 김일성 주석은 소련에서 최신형 트랙터를 구입해 기양기계공장에 보내주었다. 역설계를 통해 복제품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공장은 트랙터를 분해해 부속을 복제해 다시 조립하는 식으로 단 35일 만에 트랙터 시제품을 만들었다. 

1958년 11월 5일 시제품 조립이 끝났다는 보고를 받은 김일성 주석은 직접 전화를 걸어 공장 기사장과 통화를 하였다. 하지만 시제품은 조립 실수로 인해 앞으로 가지 않고 뒤로 갔다. 김일성 주석은 일단 갔으니 됐다, 뒤로 가는 걸 앞으로 가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면서 격려하였다. 또 시제품이 완성되면 직접 트랙터를 몰고 찾아오라고 하였다. 그렇게 9일 후 북한의 첫 자체 생산 트랙터 ‘천리마호’가 탄생하였다. 

이 즈음에 북한은 굴착기(10월 21일, 락원기계공장), 오토바이(11월 17일, ‘천리마호’), 화물자동차(11월 18일, ‘승리호’, 덕천기계공장), 불도저(12월 19일, ‘붉은별호’, 북중기계공장) 등도 자체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상 강호제, 「에피소드로 본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 15. 기계공업의 자립 : 트랙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다」, 2020.3.7.)

한국에서 흔히 천리마운동이라고 하면 북한 근로자들에게 일을 많이 시켜서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북한은 천리마운동을 단순한 증산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공산주의 인간형의 창조를 목표로 한 사상개조운동”으로 진행하였다. “천리마운동은 기본적으로 대중의 혁명적 열의와 높은 창의성, 그리고 자기희생의 헌신성을 끌어내는 운동”이었으며 이를 위해 “사람의 의식을 교양, 개조하는 사상교양사업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천리마운동’ 항목) 

또한 기술개발, 기술혁신에도 큰 힘을 넣었다. 강선제강소가 기존 생산능력의 두 배나 강재를 생산할 수 있었던 비결 가운데도 이런 기술혁신이 있었다. 김일성 주석이 강선제강소 노동자들에게 증산을 호소하는 자리에서 노동자들은 베어링 교체작업 시간을 단축하는 문제, 교대 과정에서 가열로의 온도를 유지하는 문제, 가스관에 제진기를 설치하는 문제 등 증산에 필요한 혁신안들을 즉석에서 냈고 이런 기술혁신을 통해 목표를 초과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천리마운동은 북한의 급격한 경제성장을 불러왔다. 

“천리마운동의 개시와 함께 전국적으로 기존 생산기록들은 연이어 깨져나갔고 새로운 기술혁신과 성취가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냈으며 천리마운동의 첫해인 1957년, 북한의 공업은 한 해 동안 44% 성장했고 농업은 대풍작을 이루게 되었다. 김책제철연합기업소의 노동자들은 19만 톤의 연산(연간 생산) 능력을 가진 용광로에서 27만 톤의 용선을 생산하는 기적을 창조했다. 평양 일대에서 대규모 주택 단지를 건설하면서 주택 1채당 14분 만에 건설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위키백과 ‘천리마 운동’ 항목) 

목표를 초과 달성한 사람은 ‘천리마기수’ 명칭을 받았으며 뛰어난 성과를 낸 사람은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노력영웅 가운데 한 명인 이화순 씨에 대해 김일성 주석은 “이화순 동무는 … 72대의 방직기를 혼자서 다루는 세계적 기록을 창조하였습니다. 이 기대들을 다루기 위하여 그는 하루 여덟 시간동안 180~200리를 달립니다. 이 동무가 한 해 동안에 짜내는 천만 하여도 100만 미터가 됩니다”라고 소개하였다. (고태우, 『북한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6.) 고아에다가 전쟁 시기 월북을 한 ‘남쪽출신’이기까지 했던 이화순 씨는 후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북한은 1957~1958년 천리마운동 결과 5개년 계획의 공업총생산액을 2년 반 만에 완수했고, 1960년 공업총생산액은 1956년 대비 3.5배, 알곡생산량은 1.3배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김진환, 앞의 글) 또 1956년 지표를 10으로 잡았을 때 1960년 국민소득 21, 공업총생산액 35, 농업총생산 15, 실질임금 21, 노동생산성 14로 각각 늘어났다. (위키백과 ‘천리마 운동’ 항목)

천리마작업반운동

천리마운동이 불붙자 이 과정에서 일련의 편향이 나타났다. 천리마운동이 개인적 노력경쟁운동, 기술혁신운동 성격을 가지고 있다 보니 ‘공장이야 어찌 되든, 작업반이야 어찌 되든 나만 성과를 내면 그만’이라는 개인주의, 이기주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농업, 상공업의 사회주의 개조가 완료 단계로 넘어가면서 집단주의 교양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김일성 주석은 1958년 8월 9일 시·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강습회 연설 「시·군 인민위원회의 당면한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에서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없애기 위한 사회주의 교양사업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같은 해 9월 13~16일 열린 전국생산혁신자대회의 마지막 날 연설 「사회주의 건설에서 소극성과 보수주의를 반대하여」에서는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을 강화하자고 호소하였다. 

이후 1959년 2월 김일성 주석은 강선제강소를 다시 방문했다. 당시 강선제강소는 단결이 안 되고 노동자들끼리 갈등이 생겨 계획 수행도 제대로 못 하는 상황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과거의 문제나 출신의 문제 등으로 사람들을 제끼기(제치기) 시작하면 과연 얼마나 남겠습니까?”라며 단결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지금 전국적으로 …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천리마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러자면 내용이 발전해야 합니다. … 생산활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집단의 단위가 ‘작업반’으로 되고 있습니다. 집단적 혁신운동도 작업반을 기본 단위로 하고 있고 인간개조도 작업반원들을 하나로 묶어세우는 과정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작업반을 단위로 하는 발전된 형태의 천리마운동, 즉 ‘천리마작업반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운동에서는 작업반 전체가 서로 돕고 이끌며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살며 일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천리마작업반 운동을 전개하면 천리마운동이 더욱 심화되어 인간의 의식개조와 경제건설 양쪽 모두에서 새로운 전환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해설하였다. (이상 강호제, 「에피소드로 본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 9. 천리마작업반 운동 : 북한식 기술혁신운동」, 2020.3.11.)

곧이어 3월 8일, 강선제강소의 진응원 작업반이 천리마작업반운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유평의 벌목공, 흥남의 비료노동자, 평양의 방직공, 황철의 용해공을 비롯해 전국의 노동자들이 이 운동에 합류했다. 농업 부문에서는 1960년 6월 강서군 청산협동농장 제1작업반이 가장 먼저 천리마작업반 칭호쟁취운동에 궐기했다. (김진환, 앞의 글)

진응원 작업반은 천리마작업반운동에 나서면서 다음과 같은 7개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① 노동생산능률을 계통적으로 높여 생산 계획을 일별, 월별, 분기별로 어김없이 초과완수하고 제품의 질을 결정적으로 높일 것.
② 창의 고안 및 합리화와 선진작업방법을 대담하게 도입하며 대중적인 절약투쟁을 강화하고 원가를 백방으로 저하시킬 것.
③ 작업반의 전체 생산공정에 정통하고 모두가 다기능을 소유하며 4~5년 내에 기사, 기수로 될 것.
④ 보통 지식 수준을 초, 고중 졸업 정도 이상으로 높일 것.
⑤ 작업반 내의 제도와 질서를 확립하며 노동 보호 안전 규정을 철저히 준수하며 사고를 근절할 것.
⑥ 우리 당의 정책과 빛나는 혁명전통을 깊이 연구 습득하고 집단과 동지를 사랑하며 노동과 사회적 소유에 대한 공산주의적 태도로 무장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
⑦ 생활을 문화 위생적으로 꾸리며 사회질서를 모범적으로 준수하며 각종 문화 휴식과 체육 스포츠 사업에 적극 참가할 것. 
(이상 강호제, 앞의 글)

 


결의문 항목을 분석해보면 사상(⑥), 기술(①②③⑤), 교육·문화(④⑦)로 나눠볼 수 있으며 기술혁신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1960년 8월 22일 열린 ‘전국천리마작업반운동 선구자대회’에서 김일성 주석은 그간 진행되어 온 공업 부문의 천리마작업반운동 확대는 물론이고 농업, 건설, 운수, 상업, 교육, 보건, 과학, 문학예술 등에서도 천리마작업반운동을 진행할 것을 주문하였다. (변학문, 「1960년대 초 북한의 기술발전계획과 기술혁신의 제도화 시도」,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2013.) 이로써 북한 사회 대부분이 천리마작업반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편 공장 내 생산의 가장 말단인 작업반을 단위로 운동을 진행하다 보니 천리마작업반 운동이 성과를 낼수록 공장 내 작업반 사이에 불균형이 심해지는 부작용이 생겼다. 이에 김일성 주석은 천리마작업반을 천리마직장으로 확장할 것을 제안했다. 

1961년 8월 말 기준 천리마작업반운동에 200만 명 이상의 근로자들이 참가하였는데, 그 가운데 12만 5,028명을 망라하는 4,959개 작업반과 직장이 천리마 칭호를 받았으며, 1,459명을 망라하는 55개 작업반은 2중 천리마 칭호를 받았다.

천리마작업반 칭호를 받으면 사회적, 물질적 평가를 받았다. 사회적으로는 주로 공장, 주택 지구에서 속보, 벽신문, 공장신문, 유선방송 등을 통해 선전하거나 강연회, 보고회, 학습회 등에서 선전하였다. 또 모범작업반에 승리의 깃발을 수여하고 직장에 우승기를 수여하였다. 물질적으로는 생산계획을 초과 수행하거나, 창의 고안과 발명으로 기술혁신을 일으키거나, 새 기술과 선진작업 방법을 도입해 물자절약에서 혁신적인 성과를 달성하는 집단과 개인에게 상금과 상품을 주어 표창하였다. (유영구, 『김정은의 경제발전전략 1』, 경인문화사, 2020.)

사회주의 공업국 진입

일부에서는 북한의 천리마운동을 소련의 스타하노프운동(1935년 시작)이나 중국의 대약진운동(1958년 시작)을 따라 한 것으로 폄하한다. 그러나 생산현장에서 집단주의 강화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천리마운동은 스타하노프운동과는 다르다. 또 농업 노동력을 공업부문으로 급격히 이동시키고 기술개발보다는 노동력을 집중시켰던 대약진운동과도 다른 양상을 보였다. 북한 형편에 맞게 대중운동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유영구, 앞의 책)

천리마운동의 결과 북한은 전쟁의 폐허를 말끔히 치우고 사회주의 공업화의 기초를 쌓게 된다. 1960년 총생산량에서 공업생산량이 차지하는 비중이 농업생산 규모를 앞지르면서 농업국에서 공·농업국으로 산업구조가 바뀐 것이다. 공업·농업 총생산액 가운데 공업생산액의 비율을 살펴보면 1946년 28%, 1956년 34%, 1960년 54%, 1969년 74%로 1960년을 기점으로 50%를 넘겼음을 알 수 있다. (고승효, 『현대북한경제입문』, 대동, 1993.)

참고로 당시 한국은 1960년대 초까지 농업 중심의 경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전체 취업자의 80%, GDP의 45%를 농업이 차지했다. 제조업은 국내총생산의 20% 미만이었다. 60년대 박정희 정권이 급격한 산업화를 추진했으나 제조업은 섬유, 합판, 가발, 신발 등 수출용 경공업 제품 생산이 중심이었다. 중화학공업이 육성된 건 1970년대 이후이며 광공업이 농업을 앞지른 것은 1972년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천리마운동은 공업구조 자체를 바꿔 북한을 자립형 경제구조로 전환시켰다. 과거 원료를 채취하고 반제품 생산을 주로 했던 공업구조가 반제품·완제품 생산구조로 전환된 것이다. 특히 1956년 46.5%였던 기계설비의 국내 자급률이 1960년에는 90.6%로 높아졌고 기계제작, 금속가공 제품들의 생산이 늘어났다. 중공업의 성장은 곧 경공업, 농업으로 이어져 방직, 식료, 일용품 생산이 늘어나 실질적인 주민생활의 향상을 이끌어낸다. (「만리마운동의 전신은 ‘천리마운동’ ①」, NK투데이, 2017.11.21.)

북한의 급격한 경제성장은 그 후로도 계속돼 1970년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김일성 주석은 “사회주의 공업화의 역사적 과제를 실현”하였다고 선언했다. 사회주의 공·농업국에서 사회주의 공업국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는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축에 속하는데 일부 서구 경제학자들은 북한을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가는 공업국으로 평가할 정도였다. (김연철, 「남북한의 경제정책 비교: 대립에서 협력으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04.)

천리마운동의 성공 요인

미국이 ‘석기시대’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할 만큼 폐허와 잿더미만 남은 나라를 김일성 주석은 천리마운동을 통해 짧은 기간에 복구하고 오히려 다른 나라들보다 더 빨리 사회주의 공업국으로 만들었다. 사실 전쟁이 없었다 하더라도 35년의 일제강점 기간 수탈을 당하던 낙후한 봉건국가를 이렇게 짧은 기간에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가는 공업국으로’ 발전시키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천리마운동이다. 

천리마운동이 이처럼 높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지도자와 국민의 신뢰 관계인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주석은 노동당 4차 대회에서 “당은 군중을 믿고 군중은 당을 따라 왔으며 당과 군중이 한 덩어리로 뭉쳐 … 불굴의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편집부, 『북한 ‘조선로동당’대회 주요문헌집』, 돌베게, 1999. 235쪽.)

천리마운동 과정에서 김일성 주석은 끊임없이 국민을 찾아갔고 국민은 김일성 주석을 믿고 따랐다고 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김일성 주석은 강선제강소를 시작으로 전국의 다양한 산업시설을 찾아갔으며 노동자들에게 증산을 호소했다. 그리고 생산의 발목을 잡는 문제들을 어떻게 풀지 함께 토론하였다. 여기에 노동자들은 김일성 주석의 호소에 호응하여 스스로 높은 목표를 내걸고 이를 관철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도자와 국민이 서로 믿고 의지한 것이 천리마운동의 성공 요인이라는 게 북한의 분석이다. 

또한 사상을 앞세우고 집단주의를 강조한 것도 유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투입되는 노동력을 늘리고 기술혁신을 해야 한다. 북한은 노동력을 늘리기 위해 노동자의 애국심을 높이는 방법을 썼다. 돈을 더 많이 주겠다는 식의 물질적 방법도, 자신을 위해 일을 더 많이 하라는 식의 개인주의적 방법도 아니었다. 또한 혼자 일을 잘하는 걸로 끝내지 않고 작업반 전체가 일을 잘하도록 하고, 직장 전체가 일을 잘하도록 운동을 발전시켰다. 

기술혁신 역시 소수의 과학기술자에게만 맡기지 않고 노동자 전체가 기술혁신의 주인이 되도록 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공장을 방문하면 노동자들을 모아놓고 창의적인 대책을 스스로 찾도록 의견을 들어주고 좋은 의견은 적극 도입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김일성 주석은 “대중의 위대한 창조력을 믿고 그들의 대담한 발기와 창발성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으며 그것을 실생활에 구현하기 위하여 모든 방조를 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편집부, 앞의 책)

천리마운동은 북한식 군중운동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북한은 천리마운동을 3대혁명소조운동,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으로 승화시켰다. 3대혁명은 사회주의 완전승리를 목표로 하는 사상·문화·기술혁명을 뜻한다. 지금도 북한은 주요 시기마다 새로운 군중운동을 전개하여 목표를 달성하곤 한다. 

군중운동은 대중의 힘으로, 사상의 힘으로 나라를 발전시킨다는 김일성 주석의 철학을 현실에 구현한 것으로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 데서 중요한 개념이라 하겠다. 

 

 

 

김민준 자주시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