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프독의 선포 “유럽은 미국에 종속되지 않았다”

‘친미 행보’ 보이던 마크롱, 유럽의 변화

유럽(왼쪽)과 미국(오른쪽)은 앞으로 사이 좋게 지낼 수 있을까? 전망은 흐리다. ⓒ 인터넷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조짐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경제·군사 동맹을 주축으로 미국과의 끈끈한 결속력을 보여 왔던 유럽의 반발이 심상치 않다. 최근 잇달아 공개적으로 나오는 유럽 정치권의 미국에 대한 ‘수위 높은 작심비판’은 1945년 이래 전례 없던 사건으로 평가된다.

“유럽은 더 이상 안보를 미국에 의존할 수 없다.” “유럽의 안보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8월 27일(현지시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재외 프랑스 대사들 앞에서 한 연설 중에서

또한 마크롱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유럽의 국방협력 강화 ▲러시아와의 대화를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모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반대 한다’며 강하게 으름장을 놓은 사안이다. 지난날 워싱턴을 찾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돈독한 우애를 과시하던 마크롱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욱 놀랍다.

그렇다면 마크롱 대통령의 입장은 왜 바뀌었을까. 마크롱 대통령뿐만 아니라 유럽의 고위정치권에서 비슷한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미국을 비판하는 입장이 ‘폭발’하는 점을 볼 때, 이러한 배경에는 ‘해도 해도 너무한 미국에 더 이상 휘둘릴 수 없다. 이제 유럽이 단결해 독자적 움직임에 나서자’는 유럽의 공통입장이 깔려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일국의 대통령이 섣불리 친미 행보에 나설 수 없을 만큼 유럽의 분위기가 뒤집어졌다는 얘기다.

유럽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시도들

“유럽은 미국에 종속된 대륙이 아니라 주권을 가진 대륙이다.”

-8월 27일, 블룸버그(Bloomberg)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브뤼노 르 메르 프랑스 재무장관의 말

르 메르 장관의 발언은 그동안 유럽이 미국의 강력한 압박을 받아왔다는 ‘고백’이라 함의가 크다. 이밖에 (달러에서 벗어난) 유럽의 독립적 결제시스템을 독일, 영국과 논의하고 있다고 밝힌 르 메르 장관은 “독립적 결제시스템은 미국이 자국의 영토 밖에서 제재를 가하는 과정에서 유럽이 부수적 피해자가 되는 것을 막아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프랑스는 독일과 정확히 보조를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날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은 “독일은 다국적 세계질서를 보호하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베를린에서 열린 ‘앰배서더 연례 컨퍼런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달러 결제 시스템에 대항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미 그 작업에 착수했다.” “유럽은 이란과 경제적 교류를 보호하고 결제 통로를 계속 열어두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8월 27일,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의 말

마스 장관은 “미국의 대 이란 경제제재와 마찬가지로 중국과 러시아 터키 등에 대해 미국이 취한 조치 역시 유럽 기업에 피해를 준다”며 “우리는 무역과 경제, 금융 정책에서 유럽의 자율성과 주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독자적 결제시스템을 정의했다. 유럽은 더 이상 미국이 주도하는 북한, 중국, 러시아, 이란, 시리아, 터키 등에 대한 경제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서 미국의 압박을 개의치 않고 이들 국가와 원활하게 거래하겠다는 취지다.

이러한 논의에 역사적으로 미국과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으며, 브렉시트(EU탈퇴) 협상을 진행 중인 영국도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 벗어나기’를 위한 논의가 유럽 정치권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블룸버그는 “영국도 포함된 이번 논의는 유럽 주요국이 진지하게 미국으로부터 독립성을 되찾고자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얄궂게도 유럽의 주요국인 ‘영프독’의 입에서 미국에 대한 ‘같은 날 같은 입장’이 제시된 것인데, 복잡한 이해관계가 오가는 국제정치의 특성상 앞서 소개한 정치인들의 발언은 사전에 조율되었을 가능성이 무척 높다.

유럽이 ‘유럽의 안보’ ‘유럽의 주권’ ‘유럽의 독자적 결제시스템’을 강조하는 대목에선 더 이상 유럽이 미국에 옴짝달싹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유럽이 1945년 이후 처음으로 그것도 공개적으로 미국에서 벗어난 독자적 질서에 시동을 걸고 있는 것이다.

지난 냉전시절 미국은 ‘유럽의 든든한 우방’을 자처하며 경제와 국방 등 사회·정치 전반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 미국은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전쟁후유증으로 휘청거리는 유럽 16개 국가에 막대한 비용을 지원하는 마셜플랜으로 유럽경제를 손아귀에 쥐었다. 아울러 1948년에는 공산주의 진영과의 대결을 강조하며 워싱턴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출범시켰다.

미국이 대서양 건너 다른 대륙인 유럽에서 ‘대장 행세’를 하는 풍경이 그동안 펼쳐진 것이다. 미국에 빚을 지고, 국방을 의존하며 전쟁으로 황폐화된 사회를 복구 하느라 유럽은 70년 동안 미국의 입김 아래에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이제 유럽은 ‘미국 우선주의’를 강조하며 유럽에 온갖 부담을 떠넘기는 트럼프 행정부를 맹렬히 비판하며 첫 일탈을 시도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유럽 경제규모 1위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유럽과) 미국과의 관계가 변화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면서 미국과 반목하고 있는 터키와의 관계 개선, 러시아와 시리아전쟁·가스관연결 관련합의에 나선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럽의 주권”을 강조한 르 메르 장관과 동일한 맥락에서 나온 행동인 것이다.

여러분도 아시다다시피 정상급 인사가 공개석상에서 던지는 ‘메시지’는 그 의미가 무척 크다. 그동안 미국의 ‘횡포’에 대해 수위를 조절하던 영프독이 거리낌 없이 독자행보에 나선 일련의 상황은 미국에 대한 공개선포라 풀이해도 큰 무리가 없으리라.

‘더 이상 미국은 아니다’ 확산된 세계의 목소리

그렇다면 미국 일변도의 세계질서에 대항해 하나로 뭉쳐 ‘새 판’을 짜겠다는 유럽의 움직임이 앞으로 빛을 볼 수 있을까. 독일과 프랑스는 이미 달러를 대체할 독자결제시스템을 위한 논의에 들어갔고 구체적인 논의를 진전시키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 대체 및 미국의 군사개입을 배제하기 위한 유럽군 창설 논의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유럽의 단결’은 중국과 러시아의 위상 강화 및 “북한과의 협상은 없다”던 미국이 꼬리를 내리고 북미정상회담에 나선 상황 등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며 다극화되어가는 세계질서의 강한 자극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터키에 대한 미국의 제재로 리라화가 폭락하자 독일과 프랑스가 “경제 안정을 돕겠다”며 터키의 손을 서둘러 잡은 풍경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당초 시리아의 아사드 정부를 공격하던 미국의 입장을 쫓던 두 나라가 “아사드 정부의 역할을 인정한다”며 입장을 선회해 러시아의 푸틴,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 이란의 로하니 대통령과 시리아전쟁 종식을 위한 논의에 나선 모습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흐름을 진단하자면 ‘친구’가 점점 없어지는 미국이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형국이다.

“미국이여, 동맹을 고맙게 여기라. 따져보면 (친구가) 많지도 않다.”

앞서 지난 7월 10일 도날트 투스크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나토·유럽연합(EU) 협력안 서명식에서 이와 같은 돌직구를 던졌다. 유럽이 본격화시킨 ‘초강대국 미국이 없는 세계’가 미국의 입김을 받고 있는 세계 각국에 큰 자극을 주리라는 점은 확실하지 않을까.

왼쪽부터 순서대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 합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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