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14.

북한은 올해 1월 조선노동당 제8기 제6차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김일성 주석 탄생 110돌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탄생 80돌을 “승리와 영광의 대축전”으로 “성대히 경축”하겠다고 하였다. 통일의 상대방인 북한이 국가 차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계기에 대해 우리도 학술적으로 자세히 연구하는 게 통일을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자주시보와 주권연구소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기획연재를 10회에 걸쳐 준비하였다. 

 

 

 


 

 



9. 선군정치로 ‘고난의 행군’을 돌파하다



‘고난의 행군’과 선군정치 전면화



1996년 11월 14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선노동당(아래 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 한 담화 「사회주의는 우리 인민의 생명이다」에서 “사회주의는 지키면 승리이고 버리면 죽음이다. 우리는 그 어떤 난관과 시련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이 택하고 건설하는 사회주의를 절대로 버리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 말을 했을 당시는 북한이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맞닥뜨린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사회주의 체제를 지키고, 북한을 압박하고 나선 미국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들어 북한에 닥친 위기는 혹심했다. 1990년대 초에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잇달아 무너지면서 극심한 경제난이 몰려왔다. 뒤이어 미국이 북한을 겨눠 적대적인 군사 행동과 전쟁 위협을 가했다. 그뿐만 아니라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까지 겹쳤고 소련 붕괴로 원자재 수입이 막히면서 비료 생산이 중단되어 식량 생산량도 뚝 떨어졌다. 

‘고난의 행군’은 20세기 들어 인류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대재앙이자 국가비상사태로 기억된다. 북한에서는 석탄 부족으로 발전을 못해 전기 생산이 멈췄고, 석유가 들어오지 않으니 자동차가 멈춰 섰으며, 경제봉쇄로 원자재 수입이 끊겨 공업과 물품 생산도 거의 중단됐다.

박한식 조지아대 명예교수는 “미국이 사용하는 식량무기는 매일 먹어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인간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한다”라고 지적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을 직접 방문한 박 교수는 당시 북한의 어려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의 한 탁아소를 방문했다가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그때 나를 안내하는 북한 관리들에게 이들의 부모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모두 죽었다고 답해 주었다. 생각해보라. 굶어 죽어가는 자식을 둔 부모는 자신이 굶어 죽는 그 순간까지 마지막 남은 음식을 자식에게 모두 주지 않겠는가? …(중략)… 나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탁아소의 아이들이 저렇게 죽어가느냐!’ 그러자 북한 관리들이 곧바로 나를 부둥켜안았다. 우리는 다 함께 방바닥에 쓰러져 흐느껴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서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박한식, 구술정리 박연진, 「“제재에 굶어 죽는 북한 아이들…관리들 껴안고 울었다”」, 한겨레, 2019.4.15.)

국가와 국민의 생존이 걸린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전면화한 정치 방식이 바로 선군정치다. 선군정치란 군을 앞세워 미국의 위협도 막고 경제 위기도 극복하자는 개념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3년 1월 29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 한 담화에서 “선군정치는 군사를 제일국사로 내세우고 인민군대의 혁명적 기질과 전투력에 의거하여 조국과 혁명, 사회주의를 보위하고 전반적 사회주의 건설을 힘있게 다그쳐나가는 혁명 영도방식이며 사회주의 정치방식”이라고 정의했다. (장명봉, 「북한의 2009년 헌법개정과 선군정치의 강화」, 법조신문, 2010.1.28.)

북한이 선군정치를 통해 미국의 전쟁위협을 막아냈다는 주장에 관해서는 이번 기획연재 7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핵, 미사일 개발과 외교」에서 자세히 다뤘으므로 이 글에서는 북한이 선군정치로 ‘고난의 행군’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만 다루기로 한다.



선군정치: 모든 분야에서 앞장서는 군대



북한에서는 ‘선군사상의 전통’이 일제강점기 당시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에서 비롯됐다고 강조한다. 선군정치의 뿌리를 김일성 주석의 선군사상에서 찾는 것이다. (「“선군사상과 주체사상은 함께 창시되었다” <北사이트>」, 통일뉴스, 2009.7.11.) 

한편 북한에서는 8월 25일을 선군절로 기린다. 1960년 8월 25일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근위 서울류경수105땅크사단’을 처음 방문한 날이며, 선군영도의 시작점으로 기념된다. 이로부터 30여 년이 지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5년 1월 1일 새해 첫날에 다박솔 초소를 현지지도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다박솔 초소를 찾은 날부터 선군정치를 전면화했다고 전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군정치’ 항목)

이렇듯 북한에서는 ▲선군사상의 전통 계승(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 ▲선군영도의 시작점(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근위 서울류경수105땅크사단을 방문한 날·선군절), ▲선군정치를 전면화한 날(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다박솔 초소를 처음 방문한 날)을 구분하며 모두 중요하게 기리고 있다. 그만큼 북한에서 선군정치의 뿌리가 깊고 의미가 깊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선군정치에서 군의 역할을 무척 중요시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997년 9월 인민군 당원대표회의 보고에서 조명록 인민군 총정치국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 행보와 관련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무려 16만 6,000여 리의 머나먼 노정을 이어가시며 2,150여 개의 인민군 부대들과 최전선 초소들을 찾으시었다.” (와다 하루키, 서동만 외 옮김, 『북조선-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 돌베개, 2002.)

위 일화와 관련해 와다 하루키 교수는 “방문지가 2,150여 개에 이른다는 것은 육군으로 치면 16개의 군단 사령부, 26개의 사단 사령부, 41개의 여단 사령부는 물론 모든 연대 사령부를 방문하고 대대 수준의 주둔지까지 방문했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김기협, 「북한의 ‘선군정치’ 호전성으로 이해한다면…」, 프레시안, 2014.8.11.)

북한은 국가 지도자가 현장 일선에서 직접 사람을 만나고 사업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챙기는 현지지도를 주요 정치방식으로 삼고 있다. 국내외 북한 연구자들은 북한 최고지도자가 어디를 얼마나 현지지도하느냐를 매우 중요한 정보로 여기고 분석한다. 이를 생각해볼 때, 앞서 살펴본 일화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군부대 현지지도를 매우 중시하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북한은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헌법 개정을 통해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격상하는 등 정치 체계를 개편했다. 이 회의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국방위원장으로 재추대됐다. 당시 북한에서 국방위원장은 정치, 군사, 경제 전반을 통솔하고 지휘하는 최고직책이었다. 북한은 이러한 체계 재편으로 군대가 사회 전반에서 앞장설 행정체계 상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방위원장’ 항목) 

원래 인민군은 경제건설의 주역으로는 나서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고난의 행군’을 기점으로 군대가 경제건설의 주력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러한 북한의 선군정치는 기존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와도 다소 결이 다르다. 본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인 소련을 비롯한 기존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혁명의 주력군’은 노동자계급과 농민을 뜻한다. 하지만 북한의 선군정치에서는 군대를 혁명의 주력군으로 주목했다. (김남식, 「<특별기고> ‘선군정치’란 무엇인가」, 통일뉴스, 2004.12.30.) 

미국의 위협과 경제난이라는 이중 위기에서 북한은 과거 항일무장투쟁 시기 중대한 역할을 맡았던 군대를 다시금 전면에 앞세운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 국립통일교육원에서는 선군정치의 이러한 특징을 가리켜 “군은 단순히 전쟁을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혁명과 건설을 함께 수행해나가는 역할을 담당한다”라며 “전기, 식량, 석탄, 금속, 철도운수를 비롯하여 사회주의 건설의 주공전선에 인민군대를 내세워 경제회생의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통일부 국립통일교육원 북한 지식사전 ‘선군정치’ 항목)

그렇다면 군인들이 경제건설 전반에 직접 나선 구체 사례로는 무엇이 있을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농업, 전력, 석탄, 철도운수 등 경제 핵심 분야마다 군대를 투입했다. 이렇게 투입된 군대는 농촌, 공장, 건설현장 등에서 적극 역할을 했다고 한다. (강호석, 「김정일 시대, 밥 대신 총을 잡은 이유」, 현장언론 민플러스, 2022.2.17.) 

1994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최고사령관 명령 제51호’를 내려 군대에 평양시 대동강 청류다리 2단계 공사, 금릉2동굴 건설을 명령했다. 조선중앙방송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명령을 내리기에 앞서 “중대방송이 있겠다”라고 연거푸 예고를 할 정도로 이 명령에 무게를 실었다. 김일성 주석 서거 이후 첫 최고사령관 명령이 경제건설 내용이라는 점은 앞으로 전면화 될 선군정치의 모습을 예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북한 중대방송 “대동강 청류다리, 금릉2동굴 착공”」, 매일경제, 1994.11.9.)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 군인들은 포기를 모르고 경제건설에 온 힘을 다했다. 보도에 따르면 북한 군인들이 건설현장에서 보였다는 ‘미담’은 다음과 같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현장에 불통을 만들어 설치하고 담요와 이불은 물론 자신들의 솜옷까지 벗어 씌워 시멘트를 굳게 한 뒤 공사 진행(함경남도 안변청년발전소 공사) ▲매서운 추위 속 꽁꽁 얼어붙은 땅을 1m 이상 파 들어가 기초공사 다지기(양강도 대홍단군종합농장, 포태종합농장 공사) ▲가파른 산길로 480여 일 동안 무거운 자재들을 맨몸으로 져 날라 공사 기간 단축(강원도 내평발전소 공사) ▲왕복 수십여km의 빙판을 건너 시멘트 나르기(송원언제 확장공사) ▲부족한 설비와 부속품을 직접 만들어 공사 마치기(평안북도 태천5호발전소 공사) 등이다. 이렇듯 모든 것이 열악한 건설현장에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혁명적 군인정신’을 발휘했다고 한다. (「북 군인건설자들의 ‘혁명적 군인정신’」, 통일뉴스, 2000.12.8.)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군대가 혁명의 기둥이라는 신념”으로 현지지도를 이어갔다고 한다.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고난의 행군] 정신으로 승리’ 선전」, 1997.12.15.)

이러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현지지도가 북한 전역에서 ‘건설 전투’에 앞장선 인민군에게 영향을 줬을 것이다.

국내 언론이 인용한 평양방송 보도에 따르면 인민군은 곳곳에서 살림집(주택) 건설에 나섰다. 그 결과 30만 세대에 이르는 현대적인 살림집이 북한 곳곳에 건설됐다. ▲평양에 2,000여 가구에 이르는 9·9절거리 ▲평안북도와 황해남도에 1만 가구 ▲평안남도에 4,500여 가구 ▲황해북도 마루벌 지대에 400여 채의 농촌주택과 마을 19개 등이 새롭게 꾸려졌다고 한다. (「북, 90년대 중·후반 30만가구 주택 건설」, NK조선, 2001.9.10.)

평양방송은 당시를 가리켜 “한 줌의 시멘트, 한 줌의 목재가 귀중했던 어렵고 시련에 찬 시기”였다면서 “온 나라에 근 30만 세대의 현대적인 살림집들이 일떠서고 범안리(황해북도 서흥군) 소재지 마을과 같은 수백 개의 농촌 마을들이 새롭게 꾸려지는 커다란 성과가 이룩됐다”라고 주장한다. (NK조선, 위의 글) 

또 북한에서는 평양-향산간 관광도로 건설 등을 “군대에서 창조한 모범이 온 사회에 일반화되도록 한 성과”로 꼽는다.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고난의 행군] 정신으로 승리’ 선전」, 1997.12.15.)


그런가 하면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 시기 경제건설에 나선 군인을 주인공으로 다룬 영화들도 제작됐다. 해당 영화로는 ▲군인들의 농촌지원을 다룬 <추억속에 영원하리>(1999) ▲군인들의 안변청년발전소 건설을 다룬 <나의 스승>(2003) ▲군인들의 랍도분교 방파제 건설을 다룬 <사랑의 종소리>(2003) ▲군인들의 송암동굴 개발을 다룬 <시대는 축복한다>(2003) 등이 알려져 있다.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과 선군정치 전면화를 계기로 군이 직접 나서서 건설현장, 공장, 협동농장, 기업소 등에 뿌리내리는 분위기가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근거로 북한에서 군대가 사회 전반에 밀접하고 긴밀하게 연계하는 분위기가 퍼졌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북한은 1998년에 들어서면서 ‘고난의 행군’ 종료를 선언했다. 실제로 한국은행의 추정에 따르면 “1990년대 초에 시작하여 1998년에 절정에 달한 북한경제의 위축은 1999년에 일단 멈추었으며, 북한의 GDP는 1999년 이후 2005년까지 7년 연속 플러스 성장을 했다”라고 한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이겨낸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양문수 외, 「2000년대 북한경제 종합평가」, 『정책자료』, 2012.)

군대가 무너져가던 북한 경제를 앞장서 다시 일으켰다는 평가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선군정치: ‘고난의 행군’을 넘어 강성대국 건설로

 


북한에서는 선군정치에 관해 ‘고난의 행군’이라는 위기 극복을 넘어, 강성대국 건설의 승리를 가능케 할 ‘열쇠’라고 강조해 왔다. 선군정치의 방점이 단순한 위기극복이 아니라 북한 사회 전반 발전에 찍혀 있었다는 취지다. 

국내 언론은 북한 대외선전매체 ‘우리 민족끼리’를 인용해 “혁명의 주체를 튼튼히 준비시키고 그 역할을 높이는 것은 강성대국 건설의 승리를 위한 기본열쇠”라며 “선군정치는 강한 혁명적 기질과 전투력을 지닌 인민군대를 핵심으로 하여 혁명의 주체를 튼튼히 준비시키고 그 위력을 높이 떨치게 한다”라고 선군정치와 강성대국의 관계를 설명했다. (「‘선군정치와 강성대국건설과의 관계는?’」, 통일뉴스, 2009.2.15.)

언론은 손성모 김일성종합대학 학사의 발언을 인용, 선군정치와 강성대국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에 따르면 ▲인민군대는 강성대국 건설 위업 수행에서 강력한 기둥 ▲선군의 기치 밑에 인민군대에 의거하여 난국을 타개하고 제국주의와의 싸움에서 사회주의를 수호하고 강성대국 건설의 전환적 국면을 열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북 ‘선군정치는 경제강국 건설 위한 것’」, 연합뉴스, 2001.12.8.) 

그런가 하면 국가전략의 관점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를 분석하는 학자도 있다. 이런 학자들은 선군정치를 ▲국방 과학기술을 먼저 발전시켜 이를 바탕으로 다른 부문의 발전을 견인하려 한 전략 ▲제국주의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국가전략이라고 짚었다.

강호제 교수는 “선군노선을 표방한 북한은 국방 과학기술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켜 이를 바탕으로 다른 부문의 발전을 견인하겠다는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라며 “인공위성 발사체 제작과 핵 관련 기술의 개발은 이처럼 적극적인 국방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노력이 구체적으로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호제, 「선군정치와 과학기술중시 정책 경제발전 전략의 핵심」, 『통일과 평화』 3집 1호, 2011.)

정성임 교수는 “선군정치는 제국주의와의 사상, 정치, 외교, 군사적 대결에서 승리하고 강성대국을 건설하기 위한, 즉 국가전략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분석한다. (정성임, 「1998-2007년 <로동신문> 분석을 통해 본 북한의 ‘선군정치’ 논리」, 『통일문제연구』 21권, 2009.)

위 분석에 따르면 1998년 8월 31일 북한이 최초로 쏘아 올린 인공위성인 광명성 1호 발사부터, 2022년 들어 ‘괴물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으로 불리는 화성포-17형 발사에 이르는 흐름 역시 선군정치·강성대국 건설전략의 연장으로 풀이할 수 있을 듯하다.

이를 볼 때 북한에서 선군정치를 통한 강성대국·경제강국 건설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만큼은 명백하지 않을까 싶다.

 

계승·발전되는 오늘날의 선군정치

 


오늘날 국내 일부 언론과 학계에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시기 들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가 폐기, 또는 크게 후퇴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온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있을까?

북한에서는 선군정치가 막을 내렸다고 단 한 번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오히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뒤를 이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2년에 새해 첫 현지지도로 찾은 장소가 앞서 선군정치의 상징적인 장소로 언급된 ‘다박솔 초소’였다. 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선대 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를 잇겠다고 선언한 장면으로 보인다. 

2012년 4월 13일 최고인민회의 12기 5차 회의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선군정치를 상징하는 직책이었던 ‘국방위원장’을 국가적으로 기릴 것을 확정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2012년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월 15일 열린 ‘김일성 주석 탄생 100돌 경축 열병식’에서 “자주의 길, 선군의 길, 사회주의의 길을 따라 곧바로 나아갈 굳은 의지를 표명했다”라고 밝혔다.

2019년 들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양덕온천문화휴양지 준공식에 참석해 “우리 인민군대만이 창조할 수 있는 기적”이라고 밝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건설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 재해 복구 현장에서 군의 역할을 강조해 왔다. 인민군은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경제건설을 도맡고 있고, 앞으로도 여러 분야에서 경제건설을 맡아나갈 것으로 관측된다. 이와 관련해 아래 분석을 주목해 봄직하다.

“선군시대 경제건설노선에서는 군인이 노동자, 농민, 근로인텔리와 함께 ‘혁명의 주체’로 부각되면서 인민군대의 경제적 역할은 더욱 커졌다. 김정은 시대는 그러한 역사적 경험을 계승하면서 국방공업 능력의 민수전환이라는 실리적 혁신을 통해 사회주의경제강국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유영구, 「김정은의 경제발전전략 2」, 경인문화사, 2020. 477쪽)

위 분석을 봐도 ‘북한에서 선군정치를 포기했다, 후퇴했다’는 취지로 제기된 일부 주장의 근거는 매우 빈약해 보인다. 

그렇다면 선군정치의 미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김정일 국방위원장 추대 29주년’을 맞은 지난 4월 9일 노동신문은 기사 ‘철령이여 길이 전하라, 위대한 선군 영장의 불멸의 업적을’에서 “선군의 그 길이 있어 사회주의 조국의 운명이 수호되고 우리 인민이 존엄 높은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같은 날, 노동신문은 “군대가 강하고 군대에 힘을 넣어야 사회주의를 고수할 수 있다”, “제국주의자들과의 치열한 대결전에서 연전연승을 떨치며 존엄과 위용을 만방에 떨칠 수 있었다”라며 선군정치를 강조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언을 전하기도 했다. (양은하,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추대일에 ‘선군’ 부각…“강국 도약대 마련”」, 뉴스1, 2022.4.9.)

정리하자면, 오늘날 북한에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시기 들어 선대 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 노선을 더욱 강화·계승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앞으로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북한 사회 전반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를 이어나가는 행보를 보일 것으로 관측된다.


박명훈 주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