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72년] ①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올해로 국가보안법 제정 72년째입니다. 역사적인 촛불혁명과 판문점선언 뒤에도 국가보안법을 앞세운 ‘종북몰이’와 간첩 조작 사건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이에 ‘국가보안법 폐지, 개정’을 촉구하는 의미 있는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사상의 자유를 내리누르는 국가보안법 청산을 주제로 총 4편을 연재합니다.

[국가보안법 72년] ①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국가보안법 전시회…당신의 말과 생각이 감금됐다면

지난 10월 18일,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를 부제로 단 전시회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을 찾았다.

전시회는 남영역 인근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렸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출입기록 인증을 마치고 기념관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권은비 감독이 만든 전시물 ‘12개의 문, 12개의 질문’이 줄지어 시선을 사로잡았다.

질문은 “모든 권력은 어떻게 국민으로부터 나오나요?”로 시작해 “진실은 어둠을 이길 수 있나요?”를 거쳐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로 마무리했다. 12개의 문을 배경으로 동행한 선배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촛불혁명,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에 나선 시민들과 유가족이 빨갱이로 몰렸던 나날이 지금도 머릿속을 스쳐간다.

▲ ’12개의 문, 12개의 질문’ ⓒ 이동훈

전시회를 연출한 권은비 전시예술감독은 “이 전시는 싸우는 전시입니다. 전시 제목인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의 ‘말’은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파생된 폭력적이고 억압적 언어들을 뜻합니다”라고 전한다. 말이란 곧 입 밖으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담아내야 하는 것. 그런데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자칫하면 ‘종북’ ‘빨갱이’ ‘간첩’으로 몰려 매장당할까 봐 말을 할 수 없다. 국가보안법이 있는 이상 우리는 영원히 감금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저기 좀 봐”라는 선배의 말에 고개 들어 건물 옥상을 올려다봤다. “국가보안법 철폐 없는 통일 논의 기만이다. 노태우 퇴진하라!”라고 적은 선전물을 머리 위로 번쩍 든 젊은이 조형물이 보였다. 머리가 짧기에 막연히 ‘남성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여성이었다.

▲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 축전에 참가했다가 돌아온 임수경 씨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자 ‘노태우 퇴진’을 외친 여학생. ⓒ 이동훈

민주주의 시절 엄혹한 투쟁을 이끈 사람은 으레 남성이겠거니 하는 고정관념. 하지만 정반대로 투쟁하던 젊은이는 여성이었다. 애초 이번 전시회의 주제가 ‘국가보안법에 맞서 투쟁한 여성들’인 줄 알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고 만 것이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 조사실인 5층으로 올랐다. 그랬더니 국가보안법에 맞서 싸웠던, 또는 ‘종북’ ‘빨갱이’ ‘간첩’으로 몰려 고통 받았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본격 시작됐다.

“나의 말이 세계를 터뜨릴 것이다” 이 주제로 국가보안법 피해를 겪은 여성 11명의 구술을 들을 수 있었다. 세면대와 변기가 있는 각 조사실마다 다른 글귀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나는 그렇게 몰아가도 되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오빠를 간첩이라 했던 제 괴로움을 저들은 모릅니다”, “국보법이 폐지되면 그 자리에서 춤을 출거야”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며 한동안 조사실에 머물렀다.

▲ “나의 말이 세계를 터뜨릴 것이다” ⓒ 박명훈

헤드폰을 타고 전해지는 국가보안법 피해 구술을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공안기관이 들이닥쳐 삶과 일상을 앗아간 피해자들의 삶에 감정을 이입했다. 학생운동 하다 붙잡혀간 자식을 구하러 투쟁 현장에 뛰어든 어머니들의 심정도 마음에 새겼다.

▲ 국가보안법 피해 사례 구술. ⓒ 박명훈

주최 측은 “낭독, 목소리 기부에는 배우 문소리, 조민수, 소설가 정세랑, 황정은, 영화감독 김일란, 임순례, 래퍼 슬릭, 가수 요조, 문화평론가 손희정, 세월호참사 희생자 고 김시연 학생 어머니 윤경희, 변호사 이상희님이 함께 해주셨다”라고 밝혔다. 5층 전시회에는 박종철 열사,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을 기억하는 공간을 제외하고는 여성들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특히 각 조사실마다 있던, 좁디좁은 햇살이 들어올락 말락 한 가느다란 창문이 발걸음을 붙들었다. 창문을 통해 세상 밖을 내려다봤다. 그랬더니 펄럭이는 태극기가 유난히도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이곳에 있던 열사들, 피해자들이 느끼는 마음이 나와 같았겠구나 생각을 했다.

그 순간 나는 안치환 가수가 부른 <저 창살에 햇살이>의 노래 가락을 속으로 연거푸 흥얼대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끔찍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창살을 벗어나 햇살이 찬란히 비치는 희망으로 가자. 기필코 갈 수 있다’는 마음을 담아서.

▲ 조사실에서 바깥으로 내다보는 풍경. ⓒ 박명훈

국가보안법 연대기 : 가해자들의 이력표

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옆 계단으로 내려가면 2010년대, 2000년대를 거쳐 1950년대까지 역순으로 국가보안법 조작 사건 목록을 쭉 따라가게 된다.

▲ 국가보안법 조작 사건 사례. ⓒ 박명훈

그러다 4층 박종철 열사 전시실 맞은편으로 들어섰다. 주최 측이 붙인 전시 제목은 ‘국가보안법 연대기’인데, 여기에 ‘가해자들의 이력표’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싶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12가지 주제가 빼곡히 있었다. 그 중에는 내가 아는 이름들도 있었다.

피해자 : <유엔군사령부>를 쓴 이시우 작가, 김승교 남북공동선언 실천연대 상임대표. 변호사 : 문재인, 박주민, 이재정. 검사 : 김기춘, 황교안. 국가보안법 체제의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의 이름이 교차했다.

4층 전시회에서는 딱 하나 다른 이질적인 풍경도 있었다. 저자 황교안이라고 적힌 책 『국가보안법』이 국가보안법 피해 사례들에 포위되듯 구석진 공간에 놓여 있었다. 자타공인 공안통 검사로 악명을 떨치고 박근혜 정권 때 법무장관-국무총리로서 통합진보당 해산, 국정농단에 깊숙이 관여한 그 황교안이다.

황교안이 지은 『국가보안법』은 5.16 쿠데타를 “혁명”이라며 찬양하고. 군부독재에 맞선 학생들과 시민들의 반정부 투쟁을 모조리 나라를 뒤엎는 종북 활동으로 매도했다. 촛불혁명과 판문점선언 뒤에도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은 현재 발생 중이다. 수구분단세력의 무기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옭아매고 있는 탓이다.

이번 전시회는 주최 측이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수많은 자료를 살피며 2년 동안 울고 부대끼며 준비했다고 들었다. 연인인 듯한 젊은 남성-여성, 민가협 어머니와 시민단체 활동가는 심각한 표정으로 전시회를 오가고 있었다. 코로나19 사태 속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이 없는 세상을 느끼고 상상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남영동 바깥으로 나오면서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이게 중요하지!”

밥 안 차려주고 데모(시위)하러 가냐는 남편의 말에 한 민가협 어머님이 하셨다는 말씀이다. 여기에 더해 권명희 공안탄압사건 가족대책위 위원장은 “더 이상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돼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의 악랄한 이야기를 반드시 끝장내야 한다는 말이다.

자칫하면 국가보안법에 의해 ‘종북’ ‘빨갱이’ ‘간첩’ 낙인이 붙는 사회. 그래서일까. 권은비 감독은 “거절당할 준비를 하고 (구술) 안을 드렸는데 모두 흔쾌히 동의했다”라며 기뻐했다. 우리가 전시회에서 문소리 배우, 임순례 영화감독과 세월호 어머니까지 각계 여성들이 목소리를 낸 국가보안법 피해 구술을 들을 수 있게 된 배경이다.

전시는 국가보안법을 전혀 몰라도 누구나 따라가면서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이 무척 잘 돼 있었다. 비단 피해자의 시선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국가보안법에 맞선 민주주의 사회의 주인공임을 직시하게 했다는 점이 인상에 남는다. 전시회가 제시하는 각 주제들은 우리가 국가보안법을 뚫어내기 위한 투쟁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끝없이 떠올리게 했다.

주변이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인 옛 남영동 대공분실 부지를 돌았다. 피해자들을 고문한 흔적을 불태우던 낡아빠진 회색빛 소각로는 국가보안법 체제가 현재진행형임을 실감케 했다. ‘이랬으니 많은 사람들이 국가보안법 탄압을 잘 알 수 없었겠구나’라고 절감했다. 조사실에 갇힌 피해자들이 도망칠 수 없도록 쳐진 을씨년스러운 철조망 너머 바깥세상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 소각로 ⓒ 이동훈
▲ 철조망 너머로 본 하늘. ⓒ 박명훈

이날, 10월 18일은 지난 8월 25일부터 진행된 전시회 마지막 날이었다. 늦가을을 향해 가는 어둑해지는 거리로 나왔다. 이제는 민주기념관이 된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떠나기 전 국가보안법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뒀던 콘크리트 벽을 손바닥으로 훑었다. 매우 두껍고 까끌까끌하고 차가웠다. 이제 우리의 말과 생각을 철옹성마냥 점거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에 감금된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이상 이 세상은 결코 영원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제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답해본다. 그러자면 우리 모두 세상의 주인으로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싸움에 적극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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