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방북기17-남북의 국립묘지를 찾아 역사화해를 모색하다③]평양 신미리애국열사릉 편

나의 이번 방북 기간은 2014년 9월 25일 부터 10월 6일 까지 이며 내가 설립한 NK VISION 2020의 중요 기관 중에 하나인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원장의 자격으로 방문을 했다. 특히 이번 방북에는 평소 중국과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시민권자 신분의 목회자 부부가 학술원 회원의 자격으로 나와 함께 동행을 했다. 

이번에 나의 방북 목적은 종교적인 업무와 학술적인 업무를 비롯하여 남과 북의 양측 사회가 서로 소통하고 통합 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기대감이 넘치는 마음으로 중국 심양에 당도하여 북한 영사관측으로부터 비자를 받고 평양발 고려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필자)

편집자 주: 통일뉴스 동시 게재

분단의 쓰라린 통증을 무언극으로 보여주다

나는 지난 2012년과 2014년, 두 차례에 걸쳐 신미리 애국열사릉을 찾았다. 이곳은 1급 중앙 국립묘지라는 특수성과 함께 고인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정치적 평가 외에도 대립적 관계에 있는 남북간의 체제 정통성의 경쟁이라는 무언의 긴장감이 암묵적으로 서려 있는 곳이다. 

북한에서는 생전에 국가와 사회주의를 위해 어떤 지위에서 무슨 역할을 수행했는가도 중요하지만 죽은 후에 어디에 묻히느냐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는 듯했다. 운명 후 그의 장례식이 어떻게 치뤄지며 시신이 어느 묘역에 안치되느냐 하는 것은 망자에 대한 정치, 사회적 평가를 가늠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혁명 1세대 위주로 안장된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혔다면 그는 분명 생애 자체가 투명하게 검증된 선택받은 인물일 것이며 신미리 애국열사릉도 그에 못지않게 망자나 유가족들에게는 최고의 명예가 보장된 곳이다. 

나는 묘역을 둘러보며 묘비들을 일일이 살펴보면서 두 가지 큰 변화를 발견했다. 우선 외형적으로 볼 때 묘역은 포화 상태였고 이에 대비하고자 확충했던 예비지도 이미 신설 묘지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개장 이후 지속됐던 까다로운 안장 후보자 선정과 자격 심사 기준이 다소 유연해졌으며 그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변화가 있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는 한반도 근대사와 분단사, 한국전쟁 시기 등에 대한 역사인식과 관련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는 의미이며 김정일 위원장 취임 초기의 평가 작업이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다른 관점에서 대폭적인 재평가가 이뤄졌다. 이에 따라 김정일 위원장의 직접적인 언급에 따라 과거 불미스런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의 복권 여부와 민감한 사안에 있는 인물들에 대한 안장, 이장 문제와 전반적인 재검증과 평가 등의 의미있는 여러 변화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반면 김정은 위원장 시대에는 안장자들의 범위가 더 확대되는 동시에 매우 엄격해지는 것 같았다. 동명왕릉(주몽) 부근에 ‘해외동포애국자묘’가 별도로 조성돼 운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중앙상임위원회 의장 출신인 서만술과 박희덕 고문 등의 유해들을 이곳에 안장하며 성대한 장례식을 치룬 사례나 이미 안장된 총련 지도자들의 추모모임을 해당 묘지 앞에서 성대하게 치룬 것 등을 보면 생존시 큰 공헌을 한 일본 총련 지도자들과 기업인들의 업적을 기리거나 후세에 본보기를 삼고자 하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이곳을 방문하자 이미 한 달 전에 11명의 거물급 열사들에 대한 대규모 합동 장례식(안장식)이 이틀에 걸쳐 거행됐다고 한다. 확인을 해보니 새로 안치된 유해는 김양점 인민무력부장, 인민군 군관 조석용, 부총리 리태남, 노동당 과장 김효신, 손성필 러시아 대사, 국가과학원 조종기계연구소 소장 김사명, 조류독감예방약을 개발한 홍완태, 4.15문학창작단 자료연구사 윤정철, 북한 최고의 희극작가 김세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사 장우진, 량순길 등 11명이었다. 이처럼 묘역은 좁아지고 안장대상자는 점점 많아지니 김정일 위원장 생존시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은 위원장의 주도하에 신미리 열사릉 같은 중앙 국립묘지 외에 전국 각 시도에 10곳의 열사릉을 2년 반만에 신속히 신설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돌사진의 원조,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을 찾다

평양시내에서 서북방향으로 40여리 정도를 달려 평양시 형제산 구역 신미동(신미리) 야산 앞 진입로에 당도하면 양지바른 산자락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는 평양 애국열사릉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나는 풍수지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분지 가운데 돋아 있는 지형에 소위 좌청룡 우백호의 형태를 지닌 듯 보였으며 묘역이 자리 잡고 있는 양쪽으로는 나지막한 산이 뻗어 있고 뒤쪽에도 병풍처럼 울창한 숲이 둘러싸여 있었다. 앞으로는 훤히 트여 있고 입구로 향하는 길목 좌우에는 농사를 짓는 논과 밭들과 마을 농가들이 즐비했다. 수백미터 길이의 일직선 진입로에 들어서니 멀리 정문이 보였고 가까이 이르자 멋진 필체로 ‘애국렬사릉’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는 릉대문이 나왔으며 대문을 지나니 곧바로 주차장과 함께 묘비구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문에서 초병들의 간단한 절차를 밟고 이곳을 전담하고 있는 베테랑 여성 해설사 백광옥 선생과 합류했다. 묘역으로 진입하기 위해 정 중앙 통로를 통해 수십 개 계단을 오르면 갑자기 계단이 가로막히면서 정 중앙에 검정 대리석판으로 제작된 화환진정대가 육중한 모습을 드러낸다.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렬사들의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1986년 9월 17일-” 

동으로 만든 추모 문장은 양각글씨로 부각되었고 문장 말미에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위원장의 친필 서명은 없었다. 글 내용으로 보아 이곳에 잠든 고인들의 위상이나 면모를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묘역과는 달리 묘역 전체 주변을 이동하는 작은 순환도로인 일명 ‘윤환선 도로’가 형성되어 있었고 입구에서 묘역을 향해 바라봤을 때 묘역 한가운데 절반을 가르는 경계선의 역할을 하는 대형통로가 계단으로 훤하게 조성돼 있었고 계단 양 옆으로 묘비 구역이 균형있게 펼쳐져 있었다. 무덤 구역에는 약 850여개에 이르는 흰색 화강암 비석들이 그 곳에 유해를 안장한 묘기가 있음을 표시해 주었고 모든 묘지들은 일정한 간격에 맞춰 매우 안정감 있고 여유있게 배치돼 있었으며 주변 조경과 잔디들이 최상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 묘지마다 화강암 기단 위에 150㎝ 정도 높이의 흰 화강암 대리석이 일률적으로 세워져 있고 비석 전면 상단은 돌사진이 새겨지고 하단은 고인의 이름과 생전의 약력, 생몰 년월일이 순서대로 새겨 있었으며 비석 뒷면에는 거의 모두 공란으로 남겨두었으나 부부 합장일 경우에만 ‘부부합장’이라고 작게 표시되어 있었다. 

해설사에 의하면 원래 돌사진 제작 기법은 어느 단위의 과학적 일꾼들이 다른 목적으로 연구하던 중에 돌사진 기술 개발에 성공한 것이며 보고를 받은 김정일 위원장은 “그렇다면 다른 만사를 제쳐두고 가장 먼저, 이곳 열사들의 무덤에 돌사진부터 새겨 넣자”고 제안해서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하며 당시 상황을 말해주었다.

“새로운 기술로 만든 훌륭한 돌사진을 몸소 보아주신 장군님께서는 ‘자연풍화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이 돌사진을 보니 애국렬사릉이 생각난다’시며 ‘글발만 새겨진 묘비를 볼 때마다 늘 마음이 허전했는데 이제는 됐다’고 뜨겁게 말씀하시면서 애국렬사릉의 묘비에 돌사진을 붙일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었으며 그 제작과정에서 돌사진을 무광택으로 선명하게 형상할데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지도해주셨습니다”

그 일 직후인 1998년 4월부터 작은 기계바늘 같은 것으로 화강석을 정교하게 쪼아서 만드는 첨단 석공 기술을 동원하여 본격적인 돌사진 작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변색되지 않는 생전 모습을 돌사진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유가족들에게는 매우 신기할 뿐 아니라 묘지의 품격도 높아지는 것에 큰 호응을 보이며 대중의 인기를 끌자 이후 북한의 전국 국립묘지에도 유행처럼 적용됐다고 한다. 마치 흑백 사진처럼 최대한 형상화한 돌사진은 기술적, 예술적으로 매우 정교했고 그 솜씨들이 대단해 보였다. 이곳의 돌사진 매력은 황금빛 청동 흉상을 설치한 대성산 혁명열사릉과는 또 다른 멋과 품격이 있어 보였다.

또한 묘역 상단 아늑한 장소에는 2002년도에 준공된 ‘조국통일열사 추모비’가 나오는데 탑 형식의 이 거대한 추모비는 유해를 확보하지 못한 통일열사들을 상징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별도로 설치된 특별한 묘지라고 한다. 추모비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무덤없는 40여명의 묘지였다. 추모탑 하단에는 기존 다른 묘비들처럼 돌사진과 프로필이 새겨져 있었으며 40여명이 되다보니까 둥근 원통형의 탑신을 돌아가며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또한 현재의 묘역 공간은 개장 이후 안장자들이 점점 증가하다보니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는 것처럼 보였다. 열사릉 옆에는 묘역 예비지로 남겨둔 빈터가 계단식으로 조성되었는데 이미 그곳에는 윗줄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신설 묘지들이 채워지고 있어 아마도 묘역 예비지도 금세 들어 찰 것 같이 보였다. 시신이 없는 특별한 인물 40명을 안장한 ‘조국통일열사 추모비’가 세워져 있으나 그와는 별도로 묘역 전체에는 시신이나 유골이 없는 가묘가 많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열사릉에는 몇 명의 넋들이 잠들어 있나?

해설사에 의하면 27정보나 되는 넓이에 조성된 이곳은 원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처음에 터를 잡아주었고 그 직후 김일성 주석이 현지 답사를 한 후에 최종 결정되었다고 한다. 주위에는 소나무 숲이 포근히 품어주는 것 같으면서 신비하고 아늑한 산세를 지녀 국립묘지로서 매우 적격하다며 두 지도자는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한다. 

장소가 선정된 후 2년여의 공사 끝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애국열사들을 한데 모아 1986년 9월 17일 완공했으며 개장 당시에는 190기가 안장됐으나 5년 후에는 40여 명이 늘어 230기로 늘었다. 그후 2003년 봄에는 570기, 2006년 봄에는 640기, 2007년에는 662기로 늘었다. 그 뒤로 안장자격 기준 범위가 확대되며 대상자들이 증가하게 되어 2012년에는 780기, 그리고 2014년말에는 890기가 안장돼 있었다.

어떤 인물들이 주로 안장되고 있느냐는 질문에 해설강사는 “애국렬사릉에는 우리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 건설, 나라의 통일 위업을 위해 투쟁하다가 희생된 열사들과 당 및 국가, 군대의 간부들 위주로 안치돼 있으며 과학분야를 비롯해 교육, 보건, 문화예술, 출판, 보도 부문 일꾼들과 공로자들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고 행정적인 관점에서만 설명해주었다. 참으로 각계각층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안치돼 있었으며 북한주민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 인물이지만 남한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도 있고, 이름만 대면 남과 북이 모두 알 수 있는 인물들도 눈에 띈다. 

애국열사릉에는 항일 혁명열사를 비롯해 사회주의 건설에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고위급 정치인과 관리들, 해방 후 격동기나 한국 전쟁중에 남에서 북으로 간 민족주의인사, 공로가 많은 재일교포 기업인들, 학자, 예술인, 문인, 종교인, 여성계 지도자 등을 비롯해 선군시대의 군고위급 장성들과 원수, 차수급 지도자들도 모두 이곳에 있고, 한국 전쟁시 남한에 억류되었거나 분단이후 남파되어 체포 후 전향을 거부한 비전향 장기수 등 다양한 사람들이 묻혀 있었다.

속세의 핏줄과 인연이 영면의 동반자로 이어지다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이들 중에는 생전에도 가족관계나 혈연관계였는데 죽어서도 함께 영면에 들어간 사람들도 많았다. 우선 부자지간을 살펴보면 이준-이용, 홍명희-홍기문, 최동오-최덕신, 석광희-석지민 등이 있다. 헤이그 특사로 외교활동 중 운명한 이준 열사와 신진당 당수였던 그의 아들 이용, 벽초 홍명희 부수상과 김일성대 교수와 사회과학원 부원장을 지낸 그의 아들 홍기문, 상해 임정 법무부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독립군 창설의 주역 최동오와 그의 아들 최덕신 외무부장관 그리고 교통사고로 사망한 북한 최고의 성악가이자 인민배우 석지민은 앞서 안장된 그의 부친 석광희와 나란히 부자지간의 정을 나누게 된 경우였다. 

그러나 아버지 김책 부수상과 두 아들 김국태, 김정태처럼 부자지간이 대성산과 신미리로 나눠진 경우도 있었다. 또한 몽양 여운형과 그의 딸 여연구, 항일빨치산 류경수와 그의 딸 류춘옥은 부녀지간이며 여운형의 묘지가 다른 묘역으로 이장돼 지금은 여연구의 묘만 남아있다. 몽양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경기도 양평은 나와 동향이라서 더 큰 관심이 있었다. 북에 거주했던 몽양의 3남매 중 91년에 운명한 남동생 여붕구와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과 조국전선 의장을 지내다 2009년에 운명한 여동생 여원구의 묘지는 애초부터 다른 가족묘역에 안장된 듯 이곳에는 보이지 않았으며 생전의 여연구는 어느 재미동포 목사와 연민의 정을 품고 지내며 살던 중 명절에 친구 집에 다녀오는 길에 대형 트럭에 치여 현장에서 즉사하여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변호사 출신의 허헌과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낸 허정숙도 역시 부녀지간이다. 특히 허정숙은 일제 강점기 여성 항일독립운동가로서 사회주의자가 되기 전 후 세 명의 남편을 두었고 그 후 또 한 명의 연인까지 두었으며 “사랑 없이도 육체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으며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북한 사회에서도 매우 파격적인 자유연애를 강조한 인물이다. 관운도 좋아서 과거 북한정권 초기에는 내각 문화선전상, 보건상, 사법상, 최고재판소 판사를 지내며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당선을 필두로 5~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에도 선임되고 노동당 중앙위 비서를 지냈으며 ‘조선의 콜론타이’로 불렸던 걸출한 여걸은 이제 자신이 존경하는 부친 곁에 잠들어 있었다. 

사이좋게 두 형제가 나란히 안장된 경우도 있었다. 김책 부수상의 두 아들로서 인민군 정찰국장 출신의 동생 김정태는 1987년 11월에 운명하여 이곳에 안장되었고 동생의 뒤를 따라 노동당 검열위원장을 하던 그의 형 김국태 당 비서도 2013년 12월에 운명하여 안장되었다. 또한 유동열-최동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김달삼, 부주석을 지낸 김병식-안우생 등은 서로 사돈지간이다. 남한의 단독정부 단독선거에 반대하여 4.3봉기를 일으켰던 고진히(고진화)라는 제주도의 해녀도 남편 강규찬과 함께 여기에 묻혀 있어 부부지간의 묘에 해당되고, 애국열사릉 맨 앞줄 중앙통로 우측에 안장된 김용범과 박정애 부부처럼 두 부부의 얼굴이 묘비에 동시에 새겨진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부부 모두 열사이기 때문이다. 부부 중에 한 사람만 열사였다면 합장한 사실만 묘비 뒤에 적혀 있게 된다.

장례식 격식과 인물 평가의 상관관계를 확인하다 

그 동안 이곳에 안장된 고위급들은 우선 의학적으로 사망진단이 내려지면, 장의위원회가 조직되고 공식 부고를 발표한다. 그후 빈소격식, 입관절차, 영결식(장의식), 하관식(안장식) 등 다양한 장례식 과정과 절차를 밟고 이곳 신미리에 안치됐는데 나는 이들을 통해 북한의 장례식 격식 문화와 인물 평가 기준의 상관 관계를 실감있게 확인할 수 있었다. 2008년 10월에는 7.4남북공동성명의 실무 주역이었던 박성철 부주석이 95세로 타계하자 국가장의위원회가 구성되어 국장으로 치렀고 최근까지 거물급 인사들이 줄줄이 국가로부터 국장(國葬)이라는 엄청난 장례식 혜택을 받고 이곳에서 안장식을 갖고 영면에 들어갔다. 

최근에 국장 혜택을 받은 첫 번째 인물은 클린턴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백악관을 방문한 조명록 인민군 차수였다. 그가 2010년 11월에 타계하자 국가차원에서 성대하게 국장을 치렀으며, 두 번째는 2014년 7월에 타계한 전병호 노동당 군수담당 비서였는데 그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북한 핵무기 개발에 총 책임을 맡고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인데 2009년 4월에는 국제적으로 큰 이슈가 됐던 은하 2호 로켓 발사를 지켜보기 위해 현장 위성관제 종합지휘소를 찾은 김정은 위원장을 직접 영접하며 브리핑하기도 했다. 세 번째 인물은 김책의 장남인 노동당 검열위원장 김국태였다. 이와 같이 국장을 치룬 3인 모두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조문을 하거나 장례식에 참석했다(김정은 위원장이 조명록 차수를 조문할 때는 부친 김정일 위원장과 동행 조문을 했다).

이처럼 국장의 주인공이 운명하면 국가 장의위원회가 구성되고 부고를 발표하며 시신은 의학적 결론을 받은 후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동에 위치한 국가 공식 빈소인 ‘서장회관’에 안치되며 유가족들은 관례상 조문시간을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만 조문객을 맞이한다. 붉은 옻칠이 칠해진 커다란 목재 시신대(屍身臺) 위에는 마치 요람에 누워있는 모습이 연상되듯 기다란 풀잎과 생화로 시신주변을 장식한 후 붉은 천으로 시신을 덮고 얼굴과 목 부위만 노출시킨다. 고인의 머리맡에는 최고지도자가 보낸 대형 근조화환이 정 중앙에 자리잡고 좌우에는 흰색 꽃으로 치장된 당·정·군 등 각급 기관에서 보낸 조화들이 정돈되게 세워져 있으며 조화 양옆에는 의장대원들이 집총자세로 근무한다. 시신대 옆 네 모퉁이는 집총 자세의 조선인민군 명예 의장대원 4명이 지키고 있으며 그 뒤로 유가족들이 일렬로 늘어서 조문객을 맞이하며 마지막 날 장의식(장례식)은 특별한 의식과 절차는 없으며 운구행렬과 운구차의 시가 행진은 의식이 규정되어 있다. 

운구시에는 목관을 붉은 천안에 넣고 네 명의 운구위원이 들것처럼 운반하며 운구 양옆에는 집총한 명예의장대가 호위한다. 운구위원 뒤에는 장의위원들, 유가족들이 따르며 운구 바로 앞에는 고인이 받은 평소 받았던 모든 훈장을 담은 프레임이 앞서가고 맨 앞 선두에는 최고지도자의 대형 근조화환이 의장대원들에 의해 받들려 행진한다. 특히 운구차가 평양 시내를 통과할 때는 연도에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서 애도하는 것이 관례인데 가장 독특한 운구의식을 치룬 인물은 조명록 차수의 행렬이었다. 붉은 기에 싸인 그의 관은 운구차가 아닌 군사용 장갑차 위에 안치되어 모터 사이클의 호위를 받으며 평양 시내를 지나 신미리로 향했으며 연도에는 10만명이 넘는 군중들이 나와 그의 명복을 빌며 송별했다. 

또한 장지에 도착해 치루는 안장식은 인민군 3군 의장대가 총을 들고 대열을 지어 천천히 통과하는 운구를 향해 경의를 표하고 곧바로 추도사 순서가 있다. 그후 인민군 장병들이 공중에 예포를 쏘아 경의를 표하고 바로 관을 매장한 뒤 최고지도자의 화환과 당정군 등의 기관 명의 화환을 묘비 앞에 놓고 안장식에 참가한 모든 지도자와 조문객, 유족들이 일제히 묵도를 하는 것으로 모든 장례식 절차를 마친다. 이처럼 애국열사릉은 최고지도자를 제외한 다음 서열과 후속 인물들이 연이어 안장되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주목했던 다양한 인물들

내가 이번에 가장 관심을 가졌던 인물의 묘지는 자본가 신분으로 자진 월북해 분단시대의 남과 북에서 진정한 자본가의 면모를 보여준 이종만 선생이다. 해방 이후 27전 28기로 실패를 딛고 일어서 53세 나이에 금광왕으로 등극하고 대동광업회사를 설립해 수익금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공익사업을 시작했던 그는 부를 누리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부를 베풀기 위해 돈을 벌었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었다. 그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조국전선의장, 광업부 고문을 역임한 후 1977년에 93세로 타계하여 이곳에 안장됐다. 그의 딸 이남순 여사는 캐나다에 살다가 현재 제주도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으며 손녀 딸 김반아 여사는 한국과 미국 등을 오가며 필자와도 연관된 통일운동을 함께 하고 있다.

또한 내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묘지는 노동당의 길재경 부부장이었다. 이미 죽어 이곳 애국열사릉에 고이 잠들어 있는 길재경 부부장(김정일 노동당 총비서 서기실 부부장)이 뜬금없이 미국에 망명했다는 서울 연합뉴스의 미확인된 악의적 보도로 인해 2003년 5월 중순은 온통 남한의 대다수 신문 방송 언론들이 이 문제로 들끓게 했다. 일부러 묘역 맨 상단에서 두번째 줄 통로가에 서 있는 비석을 찾아가 확인해 보니 “길재경 동지, 당중앙위원회 부부장, 1934년 10월18일생 2000년 6월 7일 서거”라고 적혀 있는 것이 다시금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같은 길재경 망명설 같은 오보를 비롯해 아무런 근거 없는 대북소식을 허무맹랑하게 생산해내는 이른바 ‘정통한 외교소식통’이라는 인물과 그 진원지가 누구인지 나는 짐작이 간다. 그들의 이같은 행동은 반인륜적인 처사일 뿐 아니라 우리 조국의 통일을 가로막는 반민족적, 반통일적인 의도를 가지고 적대정책을 하려는 세력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1920~30년대 초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과 같이 남만주 일대를 종횡무진하며 포효했던 항일 용장 양세봉 선생은 남한의 동작동 국립묘지(가묘)와 더불어 이곳에 그의 유해가 안장돼 있었다. 또한 한국전쟁 때 북으로 올라간 저명한 재북 저명인사들의 묘지는 이곳 신미리와 용궁동 재북인사묘역에 모두 73기가 안장돼 있으며 이곳에는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류동열, 윤기섭, 오하영, 엄항섭, 최동오 이상 8인의 인사들이 북의 일반 애국열사들과 함께 나란히 누워 있었다. 이들 중 오하영, 윤기섭, 조소앙 3인은 6.25 직전의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5.30)에 당선된 현역 의원들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명인 오하영 목사는 2대 의회 개원시 사회를 보던 인물이다. 또한 감리교목사 출신으로 3.1운동 33인 중의 한 명인 김창준(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의 묘지를 비롯해 여러 명의 목회자 출신 정치인과 독립운동가들의 묘지들도 눈에 띄었다.

고위급 정치인으로는 수많은 인물들이 있으나 부주석을 두 번 지낸 강량욱 목사를 비롯해 연형묵 총리가 눈에 띄었으며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역임한 리영, 노동당 중앙위원회 검열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류연화, 마르크스주의 경제사학자이면서 초대 교육상을 역임한 백남운, 초대 내각 무임소상을 지낸 국어학자 이극로, 초대 보건상을 지낸 리병남, 홍남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인 허헌의 묘지도 여기 있었다. 체육계나 운동선수로는 최홍희 국제태권도연맹 총재, 70년대 중반 세계선수권대회를 2연패했던 탁구선수 박영순 등이 있으며 영화 연극인으로는 배우 황철, 엄길선 조선예술영화촬영소 고문, 신동철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단 단장, 고옥성 국립연극단 배우,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 등이 있었다. 

방송인으로는 북한 아나운서의 대명사인 이상벽이 있고 음악예술인으로는 월북 음악가인 작곡가 리면상, 김원균, 바이올린 연주로 명성이 높은 인민배우 백고산 등이 있고 문학인으로는 60년대까지 북한 문학계의 양대산맥으로 군림했던 소설가 한설야와 이기영, 수령형상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장편서사시 ‘백두산’과 ‘김일성장군의 노래’ 가사를 써 혁명시인의 칭호를 들었던 조기천과 리찬도 있었다. 내각 부수상에 올랐던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 시인 조기천과 이찬을 비롯해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작가였던 박팔양이 있었고 학자로는 김일성대학 총장인 정진석, 잠학분야 개척자로 박사 1호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계응상, 경제학자 김광진, 역시 경제학자이자 초대 교육상을 지낸 백남운, 과학자 도상록, 어학자이자 조국전선 의장을 지낸 리극로, 리만규 등도 이 곳에 안치되었으며 서울대 교수를 하다가 월북한 걸출한 화학자 리승기 박사, 김상련 농업과학원 연구사, 한동식 과학원 소장과 김응상 연구사 등이다. 또 연안파의 거두 무정 장군과 군 장성급들인 인민군 차수 리두익, 강건군사학교 조명선 교장, 김봉률 인민무력부부장, 태병렬, 손종준, 김양춘, 윤영경, 정상우 등이 있다. 

비전향장기수들 중에는 장기수의 상징 리인모를 비롯하여 지난 2000년 북으로 송환된 후에 타계한 신인영, 리종환, 윤용기, 정순택 선생 등의 묘도 보였는데 비전향장기수들이 운명하면 모두 이 곳에 묻히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지리산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로 명성 높았던 이현상, 제주 4·3사건 당시 무장봉기대를 이끈 두 주역 김달삼(본명 이승진)과 이덕구를 비롯해 해방직후 서울에서 활동한 기반으로 훗날 북한이 ‘타도제국주의동맹’ 신화를 창출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최일천의 묘도 있었다. 남로당 지하당 총책 김삼룡 등이 있고 조봉암 등 혁신계 인사를 포섭하려 한 혐의로 체포돼 사형당한 박정호, 한국전쟁 중 노동당 충남도당 위원장 박우현,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 이승만 정권 말기 혁신정당이었던 사회당 서울시당 조직부장 최백근 등이 여기 묻혀 있었다. 

그러나 김삼룡의 묘는 있지만 이주하의 묘는 보이지 않았으며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과 대결을 벌여 간담을 써늘하게 했던 이승만의 정적인 죽산 조봉암과 해방직후 조선인민당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피살된 몽양 여운형, 1968년 8월 한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당한 통혁당 서울시위원회 위원장 김종태, 전라남도위원회 위원장 최영도 등의 묘지는 원래 이곳 묻혀 있었는데 현재는 다른 곳으로 조용히 이장됐다고 한다. 

잘 알다시피 원래 최일천, 김삼룡, 이현상, 조봉암, 김종태 등의 실제 유해는 도저히 북에 있을 수 없는 인물들로서 그들의 상징성을 위해 시신 없는 허묘가 조성된 것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없어진 것이다. 이처럼 애국열사릉에는 이들과 같이 ‘상징적인 허묘’ 또는 ‘불가피하게 시신이 없는 가묘’의 형태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이같은 결과는 아마 혁명적 생애나 명예를 중시 여기는 북한 당국의 결정 때문인 듯했으며 생리학적인 죽음보다는 정치적인 생명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북한 특유의 생사관의 결과로 볼 있을 것 같다. 

참관지 제한 규정을 해제해야 남북이 화해된다

지난 2005년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남과 북의 책임 있는 고위급 대표단들이 공식적으로 양측의 국립묘지를 참배한 적이 있다. 북측은 8월 15일 서울에서 열린 8.15 민족대축전 기간에 32명의 당국자들과 민간 대표단이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아 역사적인 참배를 했고 이어서 8월 24일에는 남측에서도 민주노동당 의원들과 일행 20여명이 답방형식으로 방북해 대성산 혁명열사릉과 신미리 애국열사릉을 참배했다. 이 얼마나 훈훈한 감동적인 모습인가? 

때로는 산자들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죽은 자들이 풀 수가 있나보다. 유골에는 사상과 이념이 없듯이 죽은 자에게는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가 남아 있을 수 없고 오직 하나의 민족, 하나의 핏줄만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후 2006년 10월 1일에는 분단이후 60년 만에 처음으로 임시정부 요인 남측 후손들이 북측의 국립묘지를 비롯해 재북인사묘와 일반묘역 등에 안장된 조상들을 성묘한 적이 있었다. 이와 같이 조상의 힘을 빌려 민족화해에 성큼 다가가는 것도 우리들의 현명한 방법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한에 거주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북한을 공식 방문할 경우 정부의 통일부와 정보기관에서는 사전교육을 통해 북한의 3대 참관지 제한장소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그 조건하에서 허가를 내주고 있다. 3대 참관지라고 하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유해가 안치돼 있는 금수산태양궁전과 대성산 혁명열사릉, 신미리 애국열사릉을 말한다. 쉽게 말해 이 세 곳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잡음이 끊이질 않고 있으며 남과 북 모두에게 화제와 논란이 되고 있다. 보다 못한 북측은 지난 제17~19차에 이르는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상대측 지역을 방문하는 자기측 인원에 대해 참관지 자유방문을 허용하라’는 참관지 제한 철폐를 핵심의제로 제기하기도 했다. 북측은 자체 내에서 이미 남한에 소재한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것에 대해 열려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해 주었는데 말이다. 

그 어떤 형식의 교류 방문이든 상대측의 국립묘지를 참관하는 것은 역사의 거시적 안목과 대승적 관점에서 허락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처럼 남북이 대립각을 세우는 교착상태에서 빨리 회복되는 길은 궁극적으로 참관지 제한을 해결해주는 방법 뿐이 없다. 또한 참관지 제한 해제 외에도 이산가족 상봉처럼 남북의 후손들이 조상의 묘를 서로 찾아가 자유롭게 성묘하는 일을 허가할 때 남북의 화합과 협력이 가능해진다. 남측의 방문자가 평양에 소재한 참관 금지 장소를 방문했다고 해서 상대 체제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거나 굴복하는 자세가 결코 아니다. 다만 통일의 과정에서 서로를 인정하며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열린 자세이며 같은 동족으로서 민족애의 표현일 뿐이다. 

후손들이 오가며 성묘가 가능해야 남북이 하나 된다

이제 신미리 애국열사 묘지를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자타에 의해 한국전쟁 시기에 방북하여 북에서 생활하다가 숨을 거둔 민족진영 인사들을 생각하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인생의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겪은 후 마지막에 이곳 신미리 묘역에 누워 남쪽하늘을 바라보며 그들은 무엇을 소원하고 있을까? 한 평생을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 갈라지는 이 땅의 분단을 온몸을 던지며 막으려 했던 저들이 아닌가? 저 분들에게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분단체제가 길고 잔인했을 것이다. 지하에서 지금도 통곡할지도 모르는 그들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무덤에 위로의 술 한 잔을 올릴 날이 빨리 도래하기를 기대해 보며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 당국이 서로 후손들의 성묘를 허락해야 서로 소통하고 간극을 좁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무리하지 말고 우선 남과 북이 공통으로 기리는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중에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김규식(임정 부주석), 윤기섭(의정원 의장), 조소앙(외교부장), 조완구(내무부장), 최동오(법무부장)를 비롯해 재북인사묘에 안치된 김상덕, 김의한, 안재홍, 장현식 등 임정에서 요직을 맡았던 9명에 대한 성묘를 다시 재개하는 것을 시작으로 성묘 대상자들을 일반인으로 확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들 9명은 모두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89~90년 정부로부터 독립장, 애국장, 대통령장 등 훈장과 포장을 받은 인물들이며 남과 북에서 모두 인정하고 존경하는 인물들이다. 이런 인도적 사업이 정례화되면 남북관계 회복에 얼마나 좋은 영향을 끼치겠는가를 깊이 생각해 본다. 

최재영 목사 


 한국 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미국 The Light of Glory Church 담임목사 역임

 소셜무브먼트그룹 NK VISION 2020 설립 & 대표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장 & 동북아종교위원회위원장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해외총회 남가주노회 소속 

 미국 풀러신학교 대학원 선교목회학 박사

 미주장신대학교 대학원 구약학 석사

 미주총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석사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철학교육학

 안양대학교 신학과 同 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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