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의 국립묘지를 찾아 역사화해를 모색하다⑩]국립 대전현충원 편

국립 대전현충원을 찾다
오늘(2014.10.9)은 숙소로 정한 대전 장태산 휴양림에서 자동차로 대전현충원을 향해 출발했다.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운전을 하며 창밖의 경치를 둘러보니 그야말로 천고마비의 계절답게 푸르른 가을하늘과 울긋불긋한 단풍이 적당하게 어우러져 기분마저 상쾌해졌다.
가을 들녘과 산야를 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현충원에 당도했다. 이곳에는 나의 둘째 외삼촌 강권 선생이 안장된 이유로 그 동안 네 차례의 참배와 참관을 했으며 오늘까지 모두 다섯 번을 방문했다. 두 차례는 서울에서 기차로 내려가 대전역에 하차해 잠시 지하철을 이용한 후 무료로 운행하는 현충원행 셔틀버스를 타고 온 적이 있었고, 차량을 이용했을 때는 경부선을 타고 내려오다 유성 IC로 빠져나와 32번 국도를 이용했다.
매년 현충일과 6.25 한국전쟁기념일만 되면 수많은 참배객들과 유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시끌벅적한 이곳이지만 평일(목요일) 이른 시각이라서 그런지 묘역 입구와 경내는 매우 한적하여 침묵속에 잠긴 듯했다.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꼭 특정 기념일이 아니어도 가끔씩 방문하는 것도 중요하리라 생각했다.
행정구역상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번지(옛날 갑동 산 23-1)에 위치해 있는 이곳 국립 대전현충원은 지도를 살펴보니 계룡산맥 갑하산의 우렁찬 기운이 왕가산으로 힘있게 이어지는 산자락 품안 100만평의 공간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묘역 앞으로는 도덕봉과 신선봉에서 발원한 유성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절세의 명당이었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도 명당이었거니와 이곳은 더 편안하고 고즈넉한 지형으로 보여서 그런지 호국묘지로는 최적의 명당으로 보였다. 특히 현충원을 감싸고 있는 둘레길은 전체 묘역을 포근히 둘러싸며 조성된 숲속 오솔길로서 묘역을 한층 더 신비한 비밀의 정원처럼 보이도록 했다.
 


 
현충원 둘레길 산책로를 걸었던 지난 추억
현충원 정문 앞은 표지석이 세워졌고 현충교라는 다리에는 4개의 석등이 각각 세워져 있었는데, 세 마리의 사자가 연화대 위에서 석등을 앞발로 떠받쳐들고 있는 형상이었다. 예술적 조형물같은 이 다리를 건너면 하늘을 나는듯한 말들을 형상화한 멋진 ‘천마웅비상(天馬雄飛像)’이 나오며 현충원역에서 시작된 수백개가 넘는 태극기들은 현충관까지 가는 거리에 좌우로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입구 우측에 있는 민원안내실을 찾아 방문목적을 알렸다. 안내책자를 받아들고 기억이 희미해진 외삼촌의 묘역 위치를 알아낸 후 본격적인 참관길에 올랐다. 이른 시간이지만 직원전용 전동카트 차량들이 경내를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묘역 전경을 한 눈에 바라보니 홍살문 뒤로는 일직선으로 배치된 분수대와 현충문, 현충탑이 엄숙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옥녀봉과 갑하산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전체적인 건축물과 조형물들은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한국적인 전통미와 현대적인 건축미가 어우러지도록 했다. 특히 지난번 방문 때는 외곽의 펜스 길을 따라서 걸어보았는데 현충원 봉안사무소 뒤편 개울건너 급경사 계단을 오르면서 코스가 시작돼 애국지사 묘역 옆으로 내려왔으며, 역순으로 산책하는 것도 가능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은 양복과 구두를 착용해 장거리 산책은 무리가 있을 듯 했다. 외곽 코스길을 천천히 걸으며 음미하면 대략 20리길(8.75km) 거리에 2시간 내외가 소요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른바 메타세콰이어길, 한얼길, 보훈산책로라는 이름들이 붙여진 오솔길들 외에 최근에는 청백리길도 조성되었다고 한다.
정문 안내실 앞부터 시작되는 둘레길 시작점에서 출발하면 두 개의 해태상과 산책길 안내도 그리고 ‘대전의 걷고 싶은 길 12선’ 안내판이 나오며 시원하게 뻗은 메타세콰이어 나무와 잣나무로 이루어진 길이 나온다. 특히 사병 1묘역과 장교 1묘역 옆의 S-20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면 아름드리 참나무와 소나무로 이루어진 오솔길과 대나무 숲을 지나는데 소나무 숲속에서 뜻밖에 대나무 숲을 만나는 묘한 느낌도 가질 수 있었다. 대나무와 소나무들이 누가 더 독야청청 푸르고 올곧은지 경쟁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이동하는 도중 청청한 대나무 숲을 보면 기분전환도 되었다.
장군 제1묘역으로 올라가는 도로와 만나는 곳에는 쉼터가 있고 조그마한 동산을 빙 둘러 되돌아 내려오면 둘레길이 끝이 난다. 대나무 숲과 더불어 운치있는 소나무 숲길은 고풍스러웠고, 현충지를 비롯한 두세 군데의 아름다운 인공저수지들은 서울 경회루를 연상시키는 기막힌 호수들과 건축물들이다.
오랜만에 방문해보니 눈여겨 보거나 가볼만한 곳이 더 많아졌다. 한국전 때 싸웠던 전투기나 탱크들을 전시한 호국장비전시장, 영상교육과 홍보를 하는 보훈미래관, 한국전 때 맹활약을 했다는 기관차를 전시한 호국철도기념관 등은 가볼만한 곳이며, 돔모양의 거대한 하늘나라 우체통도 기발한 발상인 듯했다. 공식적인 참배를 위해서는 현충문과 현충탑 방문은 필수코스이며, 여러 종류의 산책로를 걷는 것 외에도 현충지등과 홍살문 앞에는 가볼만했다.
 


 
모두 11개의 섹션별 묘역이 조성되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의 공간이 포화상태가 되자 정부는 1974년 12월 중부지역에 국립묘지를 추가로 설치하기로 결정하여, 79년 4월 국립대전현충원 건설공사를 착공해 3년후인 1982년 8월 시범적으로 사병들의 유해를 최초로 안장했다고 한다. 1985년 11월에는 322만㎡(97만 4000평) 규모의 대전현충원이 준공되어 공식 개장했으며, 2014년 10월 9일 현재 총 11개의 섹션별 묘역이 조성되어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6곳으로 조성된 ‘애국지사묘역’과 2곳으로 조성된 ‘장군묘역’이 있고, 3구역으로 크게 나눠진 ‘사병묘역’과 3곳으로 분산된 ‘장교묘역’이 있으며 장·사병 제4묘역이라는 이름의 장교사병 합동묘역이 조성돼 있다. 또한 ‘경찰관묘역’을 비롯해 ‘의사상자묘역’, ‘소방공무원묘역’, ‘순직공무원묘역’, ‘독도의용수비대묘역’이 조성돼 있고, 마지막으로 ‘국가사회공헌자묘역’과 ‘국가원수묘역’이 조성되어 있었다.
특히 6·25 참전용사, 베트남전 참전용사, 군복무 중 사망자 등은 사병묘역에 안장된다고 한다. 현재 대전현충원에는 천안함 46용사와 연평도 포격 전사자 2명, 제2연평해전 전사자 6명, 6.25전쟁 전사자 2,733명 등 모두 11만 2천위가 모셔져 있고, 연간 250만명의 방문객들이 이곳을 다녀가며, 매일 평균 10건의 안장식이 벌어진다고 한다.
불교색채가 강한 서울 동작동 현충원의 운영방침과는 달리 이곳 대전현충원은 각 종교별로 ‘호국영령 합동안장식 종교의식 집전자’를 위촉하여 안장자에 대한 다양한 종교의식도 치르고 있었다. 2008년 2월 12일, 처음으로 기독교·천주교·불교가 합동안장식을 시작한 후 매일 오후 2시가 되면 현충관에 모여 ‘호국영령 합동안장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부산 동의대사태 때 숨진 경찰관들은 ‘경찰관묘역’에, 서울 홍제동 화재 진압과정에서 숨진 소방대원은 ‘소방공무원묘역’에, 남극기지 세종연구소에서 불의의 사고로 숨진 대원은 ‘의사상자묘역’에 안장되었고, 천안함 사건 하루 전에 헬기 추락사고로 숨진 장병들은 장교묘역과 사병묘역에 각각 안장되는 방식이었다. 또한 일반인들중에는 한국 원자력기술의 자립신화를 이끈 원자력계의 대부 한필순 한국원자력연구소장, 을지대학교와 을지대학병원등을 설립한 박영하 박사 등이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안장됐으며, 미국시민권자 신분으로의 문수원(휴스턴 6.25참전 국가유공자 전우회)회장은 자격요건을 충족시켜 이곳 사병묘역에 누워 있다.
 


 
내 눈에 또 거슬렸던 현충원 경내 도로간판들
해방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정부에 이르기까지 군부내 장군들은 정권의 속성상 대개 친일파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 이유 때문인지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은 경내에서 유독 가장 높고 아늑한 명당에 위치하고 있었다. 내가 3년전에 참관했을 때 내 눈에 거슬렸던 것은 묘역 여기저기에 설치돼 있던 다양한 도로안내 간판들이었다. 문제의 간판 내용들은 맨 윗줄부터 세로로 ‘장군 제1묘역, 국가원수묘역, 국가사회공헌자 묘역, 애국지사 제1묘역’이라고 씌여 있었다. ‘장군묘역’은 가장 맨 윗줄에, ‘애국지사묘역’은 맨 아랫줄에 써있는 것이었다. 물론 표지판을 제작할 때의 순서 기준은 나름대로 거리상 역순으로 기재하기 위한 듯했다. 그러나 거리상 역순이라 해도 ‘애국지사묘역’을 맨 위에 올려도 의미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당시에 나는 민원안내실에 들러 이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이번에 와 보니 아직도 그대로였다.
이는 대전현충원을 건립할 당시의 현충원 관계자들이 장군출신 집권자들인 5공 위정자들과 실세들의 눈치를 보며, 잘 보이려는 꼼수로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권의 실세들에게 잘 보이겠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해도 도로표지판 제작을 저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독립국가는 나라의 근간이 서려면 반드시 독립운동가나 애국지사를 기본적으로 존중해야 하므로 ‘애국지사묘역’ 명칭을 ‘장군묘역’ 보다 위에 써야 한다. 그런 정신이 있어야 국가의 존엄성과 정통성이 바로 설 수 있다. 친일파 장군이든 일반 장군이든 간에 ‘애국지사묘역’ 명칭은 가장 위에 써야 하는 것이 도리상, 순서상 모두 맞다. 간판안의 수직적 공간은 서열과 계급을 상징하기 때문에 애국지사들이 서거한 시간적 질서와 사회윤리적 질서를 따지더라도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 표지판을 보는 순간, 갑자기 동작동 국립묘지 가장 꼭대기 초화화 묘소에 누워 수만명의 망자들을 행해 호령하듯 내려다보는 박정희 대통령 묘소가 떠오르며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그러나 10년전에 해결된 일이지만 최근까지 확인하지 못했던 친일파 언론인 서춘의 묘지가 이장된 사실은 나름대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1묘역(151번)에 안장된 서춘의 친일행각이 드러나자 1996년 그의 서훈이 취소됐음에도 8년동안을 버티다가 시민단체의 압력으로 2004년 현충일 하루 전에 현충원측으로부터 뽑혔고 결국 며칠 후 가족들에 의해 이장을 당했다. 서춘은 1932년 조선일보 편집국장, 주필을 거쳐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사 주필을 지내며 일제의 지원병제도와 내선일체를 지지하는 글은 물론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충실하게 대변해 왔던 친일언론의 기수였다.
 




 
헌정질서 유린은 국립묘지 안장대상이 아니라 심판대상
장군 제1묘역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장인 이규동의 무덤도 눈에 띄었다. 갑자기 전두환과 관련된 사건들이 연상되며 잔잔한 분노의 역류현상이 시작됐다. 대전국립묘지가 조성된 후 이곳에는 줄곧 전두환과 관련된 비리인물들에 대한 ‘게릴라식’, ‘군사작전식’의 기습안장 사례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장군 제2묘역에는 전두환의 경호실장을 지낸 안현태 육군소장의 무덤과 그 뒤로는 12.12사태 때 수도방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육군소장의 무덤이 보였다. 현행 국립묘지법에는 자격이 있다고 해도 도박과 사기죄 경력만 있어도 심사과정에서 떨어져 안장될 수가 없는데, 헌정질서를 파괴한 쿠테타 가담자와 5.18광주학살, 뇌물수뢰 등 비리혐의가 있는 인물들이 버젓이 안장되고 있었다.
장군묘역과 장교묘역에는 안현태 외에도 유학성, 정도영, 정동호, 김호영 등 12·12 사태 관련자들이 더 있었다. 안현태는 12·12쿠데타 주역인 하나회 멤버이자 수경사 30경비단장과 공수여단장으로 5·18광주항쟁을 진압한 당사자이며 전두환 정권 시절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제6대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냈다. 그가 전두환의 경호실장을 지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립묘지 안장자격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전두환의 비자금 7,000억 원을 조성하기 위해 기업인들을 조사하고 협박했으며, 뇌물을 받고 특정범죄가중처벌법위반혐의로 2년 6개월의 징역에 추징금 5,000만 원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도 판결문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복역 중 사면(죄를 용서하여 형벌을 면제)됐고 잔형 집행을 면제받았으며 곧 이어 복권(법률상 상실된 자격과 권리를 다시 찾음)도 이뤄졌다. 징역형을 선고 받자마자 사면과 복권까지 이루어졌으니 그동안 판결했던 법의 권위는 있으나마나 했다. 국립묘지령은 전역 및 퇴역한 예비역 대상자 중 ‘금고 이상의 형을 받고 집행유예 중에 있는 자’ 등 결격사유가 있는 경우와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한다고 인정된 사람’은 안장에서 배제하고 있지만 당시 심의과정에서 일부 심의위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에서 직접개입을 하며 그의 사면 복권을 내세워 불허조항문제를 제치고 거뜬히 통과시켰다.
유학성은 12·12 당시 수경사 30경비단 모임에 참석한 12·12 핵심인물로 지목돼 군 형법상 반란중요임무 종사 등의 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복역 중 병세가 악화돼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돼 생활하다 형이 확정되기 전 숨져 대전현충원에 안장되면서 앞서 논란이 빚어졌다. 당시 국방부와 보훈처는 ‘형 확정전 무죄추정과 피고인 사망 시 공소기각’이라는 법리를 내세워 국립묘지 안장을 허용했다고 한다. 대전지역 진보인사의 말을 들어보면 유학성의 묘소를 전두환 내외가 평소에도 종종 참배를 했고, 그때마다 대전현충원측은 참배급수를 A급으로 격상하여 현충원장이 직접 집례관으로 나서는 작태까지 벌였다고 한다. 자제는 못할망정 현충원장을 집례관으로 내세우며 버젓이 대우까지 받으며 참배했던 것이다.
현충원 군인묘역에는 당연히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들과 전쟁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간 학도병들과 장병 등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들을 1순위로 모셔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탐하여 군인의 신분을 벗어나 무고한 국민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했던 쿠데타 정권의 하수인들을 어떻게 국립묘지에 안장시킬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선 그 원인과 배후에는 번번이 원칙과 상식을 무시한 이명박 정권에 있는 것으로 판명됐다. 이명박 정부는 5공 신군부 쿠데타 주역들을 졸속과 파행과 고무줄 잣대로 심의한 뒤 기습적으로 안장하는 후안무치를 보여줬다. 앞으로도 5공의 후속인물들이 연속적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된다면 우리 자녀들과 후배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며 국가의 위계질서가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부터 앞선다.
 



 
백범 암살 지령자 무덤 부근엔 백범 모친 곽낙원과 아들의 무덤이 
이곳 대전현충원에 12.12쿠테타, 5.18광주학살, 뇌물수뢰 등의 범죄를 저지른 5공 인사들을 안장한 것은 그마나 양호한 경우에 속했다. 장군 제1묘역에 안장된 김창룡 육군중장의 묘(69번)는 아직도 굳건한 반석처럼 이장이 안 된 채 버티고 있었다. 김창룡이 누구인가? 1941년 일본 관동군 헌병대를 자원입대해 헌병대 정보원을 지내며 반일세력을 색출하는 공안사찰을 담당했고 1947년 육군사관학교(경비사관학교)을 3기생으로 졸업한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원,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 육군특무부대장 등을 지냈다.
1949년에 소령, 1951년에는 육군 초대 특무대장이 됐는데 특무대장 재직시 군대내의 좌파 제거에 공헌이 커 이승만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특히 반공만 하면 친일도 상관없다는 이승만의 이념 코드와 일치했던 김창룡은 소위 ‘군부내 좌익 소탕’이라는 작전 아래 수많은 사건을 조작해 민족주의 인사들과 항일 민주인사들을 학살했으며 ‘총풍사건’도 조작했다. 1952년 5월 24일 가짜 무장공비가 피난 수도 부산 근교의 범어산에 출현했다는 사건을 조작해냈고 그 직후 이승만은 그걸 빌미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직선제로 개헌한 뒤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후 김창룡은 1953년에 준장, 1955년에는 소장으로 초고속 진급했다.
결국 김창룡은 1956년 1월 30일 오전 7시 30분, 서울 원효로 1가에서 옛날 부하직원들에 의해 5발의 총성을 맞고 36세의 나이로 절명했다. 그의 시신이 옥인동 특무부대장실에 안치된 것은 오전 9시였고 즉시 가장 먼저 달려와 애도를 표한 사람은 이 대통령이었다. 4일 뒤인 2월 3일 그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고 그는 중장으로 일계급 특진했다. 안양지역 사설묘역에 안장된 그의 유해는 1998년 2월 13일, 김영삼 정부 때 슬그머니 이곳 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에 안장된 것이다.
1956년 1월에 기록된 남한주둔 미국 첩보기관(CIC)의 문서에 의하면 “김창룡은 이승만이 직접 하기 곤란한 궂은 일을 대신 해주는 청부업자와 같은 존재였다”라 평가했을 정도로 이승만의 총애를 등에 업고 군대 내의 명령 계통을 무시하면서 무소불위의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다. 지난 1992년에는 백범 암살범 안두희 증언에 의해 김창룡이 백범 암살 당시 ‘실질적 지령’을 내린 인물로 지목됐다.
이처럼 일제 관동군 헌병으로 항일 독립투사를 잡아들이거나 처형하고 해방 후 이승만 정권하에서 양민학살과 백범 살해를 사주하는 등 반민족 행위를 저지른 인물을 국립묘지에 안장한 것은 김영삼 정부의 개념없는 역사의식부재와 실책이었다. 도여사는 현충원에 남편을 모시게 해준 국방부와 기무사령부에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안양 야산에 버려지듯 40여년간 묻혀 있던 김창룡 장군은 1998년에서야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미망인 도상원에 증언에 의하면 김창룡을 이곳으로 이장한 주인공들은 당시 국방부와 기무사령부였으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은 임재문(林載文) 기무사령관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김창룡의 무덤이 있는 장군묘지 부근에서 약 300~400 미터 떨어진 제2 애국지사 묘역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락원 여사와 페니실린 치료약을 사지 못해 병으로 요절한 큰 아들 김인 선생이 안장돼 있었다. 유족들은 김창룡의 죄과를 객관적으로 깊이 성찰했으면 좋겠다. 수십년간 사립묘역에 조용히 묻혀 있던 유해를 무엇 때문에 파헤치고 국립묘지에 이장해 독립운동가들을 욕되게 하는지 모를 일이다. 오히려 그의 미망인 도상원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2011년 6월엔 용산 국방회관에서 김창룡의 일대기를 출판하기까지 했다. 추악한 악행들이 지금보다 더 드러나 불명예스럽게 되기 전에 가족들은 자진해서 다른 장소로 무덤을 이장해야 한다. 민족사의 악인으로 오래오래 기억되어 욕먹게 하는 것이 더 좋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현충원에 세워졌던 김창룡 묘비의 종말
현재 이곳 장군 제1묘역 두 번째 줄에 있는 김창룡의 비석 뒷면을 읽어보면 친일이력은 적혀 있지 않고, 남하해 입대했던 남한 군대이력(1947년)부터 적혀 있었다. 이쯤되면 김창룡의 비석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원래 김창룡의 묘소는 경기도 안양 석수동 관악산 기슭에 있었다. 무덤에는 가로 77cm, 세로 200cm 크기의 묘비가 세워졌으며 비명과 비문은 친일 역사학자 이병도가 작성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가 사망한 지 42년만에 그의 유골과 비석은 임재문 기무사령관의 특별작전으로 이곳 대전현충원으로 은밀히 이장됐다.
2003년 7월호 <민족21>에 보도된 <시민의 신문> 정지환 기자의 구체적인 추적취재에 의하면 안양에서 가져온 비석은 규격화된 묘비만 세울 수 있는 현충원 규정 때문에 약 3∼4백 미터쯤 떨어진 장군묘역 입구에 있는 연못가 옆 빈터에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김창룡이 현충원으로 이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민단체들과 피해자 유가족들의 저항으로 결국 비석은 철거됐고, 현충원 창고에 보관되던 비석은 결국 2001년 3월 10일 충남 금산에 거주하는 김창룡의 둘째 딸과 사위측에서 조용히 가져갔다. 비석은 그의 사위가 승마장소로 이용했던 충남 금산군 추부면의 어느 야산의 창고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비석은 몸체, 머릿돌, 비석 본체가 각각 3등분으로 분리된 상태로 나뒹굴어 있었다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기자의 취재 과정에서 입수한 대전현충원 직원들의 <출장결과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에는 ‘유가족의 요구사항 청취’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아래의 시기에는 묘지의 안전 관리에 각별한 관심 요청”이라는 대목 아래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방문시
* 6·26 백범 김구 선생 추모일
* 8·15 광복절 전후
유가족들의 이같은 3가지 특별 요구사항은 기자의 말처럼 김창룡 유족이 한 말이 아니었다. 이는 이미 망자가 된 김창룡이 지금도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창룡과 유족들은 물론 반통일적인 세력들은 지금도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이뤄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고, 서슬퍼런 반공의 칼날이 녹슬게 되는 것을 가장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북의 대다수 국민들이 경축하는 8.15 광복절이 두려웠던 것이고, 대다수 국민들이 존경하며 슬퍼하는 백범 김구 선생 추모일이 남달리 무서운 것이다.
죽어서도 편치 못한 친일반공의 비극적 말로를 보며 다시 한번 ‘역사는 정의와 진실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됐다. 실제로 가해자 김창룡의 삶은 피해자 백범 김구 선생과 극명히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조국 해방을 위해 평생 풍찬노숙으로 보냈으나 정작 해방된 나라에서는 비극적 최후를 맞아야 했던 김구 선생은 오히려 사후에 온 겨레의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으나 김창룡은 사후부터 비극이 시작됐다. 슬하에 1남 3녀가 있었으나 주변의 비난 때문에 자녀들은 70년대초 남미로 이민을 떠났고 장남은 지금도 브라질에 살고 있다. 그뿐 아니라 부친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동분서주하던 큰 딸 김미원씨는 화병을 얻어 60세에 숨지고 말았다.
 


 
미그기를 몰고 귀순했던 이웅평 대령 무덤
애국지사 2묘역에서 길 하나 건너편에 있는 장교 2묘역을 잠깐 스치듯 지나다 보니 미그기를 몰고 귀순한 이웅평 대령(묘비 번호는 11-4304)의 묘지가 눈에 띄었다. 48세를 일기로 지병으로 생을 마감한 그는 당시 북한 공군 상위(대위)시절인 1983년 2월 25일, 구 소련제 미그-19 전투기를 몰고 군사분계선 상공을 넘어 귀순했다. 이는 휴전된 지 불과 2개월 뿐이 안 된 시점(1953년 9월 21일)에서 소련제 미그-15기를 몰고 김포비행장으로 내려온 노금석 조종사(북한공군 상위)에 이어 공군기를 몰고 귀순한 여섯 번째 인물이었다. 귀순 후 한자와 영어를 익히고, 경제학과 정치학을 1년간 개인교습 받는 등 남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 그는 공군 소령으로 임관돼 정보부대에서 북한정보를 분석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그후 공군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안보정책을 강의하던 중 96년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공군대학 안보정책 처장으로 근무해 왔었다.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딸과 결혼해 1남 1녀를 얻는 등 단란한 가정을 꾸렸으나 97년 10월 간경화로 쓰러졌고 이듬해 간이식 수술을 받고 회복됐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는 운명 직전 “인생의 3분의 1을 서울에서 살았지만 아직도 남한 사회에 완전히 적응되지 않아 물위에 뜬 기름같은 느낌”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나의 발길이 그의 무덤을 떠나려는데 대전 상공에는 군용전투비행기가 요란하게 굉음을 내며 총알같이 지나갔다.
 



 
국회의장, 국무총리들과 나란히 누워있는 황장엽의 무덤
최규하 대통령 묘소를 참관한 나는 국가원수묘역을 담당한 직원의 안내를 받아 경내를 이동하는 4인승 카트기를 타고 애국지사묘역으로 향했다. 국가원수 묘역에서 200여 미터 정도를 이동하는 도중 대나무 숲속을 통과하였다. 애국자묘역이 저만치 보일 무렵, 직원은 나에게 손가락을 가리키며 “저기 보이는 곳이 황장엽 선생의 묘소입니다”라며 내려주는 것이다. 순간, 황당한 마음으로 차에서 내리자 곧바로 황장엽의 무덤이 바로 나타났다.
황장엽의 무덤 바로 뒷줄에는 민관식 국회부의장(국회의장대리) 묘지였으며, 황장엽과 같은 줄에는 채문식 국회의장과 안경모 교통부장관이 바로 옆에 누워 있었다. 무덤 주변에 안장된 인물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남한 정부로부터 받은 혜택과 위상을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북한에서도 남한의 국회격인 최고인민회의의장과 김일성종합대총장을 오랫동안 역임한 경력을 배려한 듯했다.
그는 이처럼 정부의 요직을 맡은 국무총리, 국회의장, 장관들과 국내외의 명망있는 인사들이 안장된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그들과 나란히 누워 있었다. 이 묘역은 100위를 안장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는데 특히 장·차관에 재직중 순직한 인물들은 이곳에 안장된다고 한다. 맨 윗줄에는 민관식 의장 외에도 한국과학기술의 토대를 놓은 최형섭 과기처장관, 아동문학가 윤석중 선생,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무덤이 보였고 아랫줄로 내려오면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을 지낸 이종욱 박사와 국제해양법재판소 박춘호 재판관과 이영덕 국무총리의 무덤이 나왔다.
황장엽의 무덤을 보는 순간, 몇 년전 미국에서 그의 장례식 소식을 뉴스로 지켜보며 언짢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당시 나는 이명박 정부측 인사들과 보수인사들, 보수 기독교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통일사회장’으로 치러진 것을 보고 오히려 ‘반통일사회장’으로 해석했다. 왜냐하면 통일이란 나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있는 것인데, 그 대상을 무시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혹독히 비판만 했던 인물이 죽자, 남북통일에 실제로 기여한 인물들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통일사회장’이라는 타이틀로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다.
 


 
최덕신과 황장엽의 비교는 적절하지 않다
1997년 느닷없이 황장엽이 망명하자 대한민국 전체가 술렁거렸다. 혹자들은 “이건 김종필이 월북한거나 마찬가지 사건이다”, “황장엽의 탈북은 주체철학의 탈북이다”라고도 했고, 미국 워싱톤 포스트지는 “마르크스가 소련을 탈출하고, 토마스 제퍼슨이 미국을 탈출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맞서 북한에서는 그를 배신자 ‘가룟 유다’에 비유했다. 호사가들은 그의 메가톤급 지위를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안장된 최덕신 외무장관과 단순 비교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덕신과 김일성 주석은 길림에서의 친밀한 관계는 물론 부친 최동오를 후견인과 스승으로 여긴 관계로 볼 때 황장엽과의 단순 비교는 적절하지 않다.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배신자였던 황장엽은 은둔생활을 하며 반북 활동을 하던 중 87세가 되던 2010년, 자택 욕실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북한의 응징 대상 1호였던 그가 숨진 날은 하필이면 10월 10일 노동당 창건일이었으며 현 김정은 제1위원장이 최초로 열병식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어서 북측에서는 그의 사망을 경사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아내 박승옥에게 “사랑하는 당신과 아들 딸들, 손주들의 사랑을 배신한 나를 가혹하게 저주해주기 바라오. 나는 이것으로 살 자격이 없고 내 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하오”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평소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공동의 적으로 간주했던 황장엽은 남북관계 문제의 본질에 대해 ‘누가 민족을 대표하는가를 놓고 벌이는 권력투쟁이다’라고 했다. 혹자들은 그를 가리켜 남한에 와서 13년 동안 적당히 북한 정권을 비판하면서도 속으로는 주체사상을 합리화하며 가르친 인물이며 훗날 사정이 좋아지면 다시 북한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아무튼 황장엽은 생전에 자신의 뜻을 제대로 이루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망명한 뒤 곧이어 등장한 10년 동안의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그와는 사뭇 다른 대북정책의 기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입지는 더 이상 넓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망명 직후에는 각종 강연과 저술을 통해 강력하게 북한 정권 타도를 주장했으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 들어서 통일지향적인 대북정책의 영향으로 그의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으며, 10년간의 활동 제한조치를 당해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다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해제되었다. 그가 숨지자 이명박 정부에 의해 갑자기 반공, 반북 세력의 영웅이 되어 최고 국민훈장을 받고 이곳 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됐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이 재임시절 김일성 주석과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던 정책을 펼쳤던 것 때문에 김 주석 사후에도 통일지향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할 줄 알았는데 ‘황장엽 망명 성사’와 ‘김일성주석 조문 거부’ 사건으로 북한으로부터 가장 증오받는 역대 남한 대통령이 된 것에 실망스러웠다. 더구나 김 대통령은 황장엽이 죽자 장의위원회 명예 장의위원장(이회창, 노재봉 전 총리 등은 공동장의위원장)을 맡기까지 했다. 이는 ‘남북정상회담 추진 정신’과 ‘황장엽 망명 성사 정신’은 통일지향적인 방향에서 볼 때 서로 배치된다고 여겨진다.
또한 장례식 당시 재임중이던 이명박 대통령은 장례식을 5일장으로 치르도록 했고 국민훈장인 무궁화장을 수여하기까지 했다. 건국이후 지금까지 국민훈장은 7만여건 수여되었으나 무궁화장은 1%인 단 700명에게만 추서된 1등급 훈장이다. 훈장을 받은 인물이기 때문에 현충원에 안장될 자격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현충원에 안장되기 위해 기습적으로 훈장을 수여한 불법적인 모양새가 됐다.
이처럼 황장엽은 현행법상 국립묘지 안장대상이 될 수 없음에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자격이 생겨난 것이며 국가보훈처는 그 다음날로 현충원에 안장키로 일사천리로 결정했다. 이는 매우 비중있는 북한 요인이 탈북해서 남한과 적대관계에 있는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혹독하게 비판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공적을 인정해 현충원에 안장하고 보자는 식이었다. 당시 야당과 진보인사들은 물론, 보수논객들과 뉴라이트 같은 보수단체에서조차 국립묘지 안장을 반대해서 심지어 ‘우우(右右)논쟁’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나는 우파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현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훈장수여와 국립묘지 안장 사건에 대해서는 분노를 넘어 절망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모든 책임은 이 대통령이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기야 당시 이 대통령은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장례식에는 문학적 업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으나 평생을 한국사회의 개혁과 진보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던 리영희 선생과 이돈명 변호사의 장례식에는 그에 걸맞는 예우나 훈장은커녕 조화조차 안보낼 정도로 소홀하게 대했다. 이 대통령과 측근 참모들은 두 분 보다 황장엽씨가 한국사회를 위해 더 기여한 바가 많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국가수반으로서 스스로 특정 정파와 이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옹졸한 처사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애국자묘역도 모자라는데 친일파까지 품어야 하는지
그동안 이곳을 방문하며 확인한 바로는 2014년 10월 현재, 이곳 대전현충원에는 김석범, 신현준, 백홍석, 송석하 등을 포함해 33명의 친일인사들이 안장돼 있으며 이 밖에 현재 친일행적이 확인돼 보훈청으로부터 서훈이 취소된 강영석과 박성행 등 2명도 여전히 안장돼 있다. 더구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 반민족행위자 5천명의 친일 인물중에 이곳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이들 중에는 군인과 경찰 출신을 포함해 국가로부터 애국훈장을 받은 인사들도 수십명 정도 있다.
나는 속으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도 아니고 이건 뭐, 허구 많은 숫자중에 왜 33인이야?”라는 생각이 스치며 “하기야, 민족대표 33인중에도 친일파가 있었지?…”라며 체념석인 넋두리를 하며,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마저 친일행각을 했으니 역사의 실체적 진실규명은 양파껍질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현재 전국의 8개 국립묘지에는 80여명의 친일혐의자들이 안장돼 있는데, 이곳 대전현충원에 33명, 서울현충원에 39명, 다른 국립묘지에 4명 등이 묻혀 있다(새로 조성된 국립산청호국원에 안장된 친일파는 아직 미확인).
통탄할 일은 또 있다. 아직도 백범 김구 선생이 묻힌 곳은 국립현충원이 아니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이다. 그곳은 이동녕, 차이석, 조성환 선생을 비롯해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의 유해가 묻혀 있으며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조성돼 있다. 이분들은 민족반역자인 친일파들이나 쿠테타 세력들과는 결코 같은 공간에 묻힐 수 없을 정도의 항일투쟁의 상징적 인물들이다. 그러나 아직도 국가차원에서 돌보기는커녕 정부와 국가보훈처는 외면하고 있고 서울 용산구청이 ‘공원시설’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는 정도의 수준이다. 친일파와 군사반란자들은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고, 김구 선생을 비롯한 항일독립투사들은 ‘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는 격이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격상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아무런 역사의식도 없고 관심도 없다. 역사의식이 있는 정권에서는 국립묘지로 승격시키거나 성역화 할 줄 알았는데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그럭저럭 지나갔다.
나라가 제대로 세워지려면 서울과 대전의 국립현충원에 누워 있는 친일부역자들과 군사 반란자들과 범법자들을 이장하고, 그 자리에 효창공원의 인물들을 비롯한 초야에 묻혀 있는 애국인사들의 묘지들을 찾아 옮겨야 원칙이다. 수유리 묘역에는 성재 이시영(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해공 신익희(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가인 김병로(문화훈장, 건국훈장 독립장) 선생들이 아직도 쓸쓸히 누워 있고, 만해 한용운(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위창 오세창(건국훈장 대통령장), 소파 방정환(문화훈장, 건국훈장 애국장) 선생들도 망우리 공동묘지에 방치하다시피 누워 있으니 어서 속히 국립현충원의 가장 양지바른 곳에 이장해야 한다.
국립현충원을 자신들의 안방처럼 여기는 친일파, 쿠테타 반란자들의 삶과 저런 분들의 삶과 죽음을 비교할 수 없으니, 대한민국이 민주국가라면 이런 부끄럽고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현실을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역사정리를 끝내야 한다. 오히려 국립묘지에는 국가의 안녕과 질서에 위해를 가한 친일파, 독재자, 쿠데타 주모자 등의 범죄자들이 다수 매장돼 있다는 사실은 정치 지도자들의 반통일적 이념에 사로잡힌 그릇된 역사의식과 몰가치의 극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애국지사들 앞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국가차원에서 하루빨리 국립묘지의 재구조화를 단행해야 한다.
오죽하면 마지막 임정요인 백강 조경한 선생이 “내가 죽거든 국립묘지에 묻지 말고, 생사를 같이 한 이들이 누워 있는 효창원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겠는가? 친일 전력자이지만 이런저런 경력과 공적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현충원에 묻힌 친일파들과 쿠데타 비리 세력들로 인해 ‘친일파의 안식처’란 오명을 쓰고 있는 현충원에 묻히기가 싫었던 것이다.
 
좌익경력 항일투사는 안장제외, 친일반공 경력은 안장허용
대전현충원의 재구조화를 생각하며 복잡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대전현충원에서 발길을 돌렸다. 과거 대통령 직속 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반민족 행위자로 규정한 인물들과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서훈이 취소된 인물들은 국립묘지에서 다시 이장하도록 해야 하는데 현재 국립묘지 법률내용은 안장 대상자만 규정하고 있을 뿐, 친일인사 등 기존에 이미 안장된 사람의 무덤을 강제 이장하는 법규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대전현충원측에서는 “국립묘지 현행법상에 문제가 없는 인물이라면 친일파라고 해도 이장할 수도 없고, 안장을 막을 수도 없다”는 입장이었다. “국립묘지 현행법상 군이나 경찰 등 경력 요건이 충족되고, 전과 등의 흠결이 없다면 국립묘지 안장을 막을 근거가 없으며 안장에 관한 실질적인 결정은 정부의 보훈처에서 하는 것이고, 서훈이 취소된 경우라도 유족이 동의하지 않는 한 강제 이장은 불가능하다”고까지 했다.
나중에 국가보훈처 선양정책과 직원에게 물어보니 “친일 혐의만으로 국립묘지 안장에 불이익을 줄 수는 없는 것이고, 공신력 있고 권한있는 기관이나 기구의 객관적 자료에 의해서 서훈이 치탈될 경우에는 이장 조치는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관련 공무원들의 이같은 언급들은 명백히 이중잣대로 보였다. 과거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의해 옥고까지 치른 조동호, 김시현, 장재성 선생 등 항일 투사들에 대해서는 국가보훈처가 어떻게 대했던가? 그분들이 한때 좌익 운동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독립유공자 선정심사에서 무조건 제외시켰다.
 
반공만 하면 친일도 상관없다는 이승만, 박정희 이념코드가 민족비극의 시작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친일파들은 당장 설 곳을 잃게 되자 자신들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 후 반공의 기치를 내세우며 자신들을 애국자로 둔갑시켰다. 그 과정에 우리 민족의 비극은 시작된 것이다. 오늘 이곳을 참관을 한 결과, 서울 동작동에 있는 현충원과 마찬가지로 이곳 대전현충원 역시 친일파의 흔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그들의 묘지는 한결같이 가장 양지바른 곳을 꿰차고 있었다. 친일 행각을 벌인 자신들의 과거를 포장하기 위해 반공의 기치를 높이 들고 애국자인양 행세한 친일파 군인들을 보면 그들의 교활함에 분노가 치민다.
심지어 친일경력의 장교신분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 인민군들에 의해 서울이 함락되어 점령되자 1950년 7월 29일 이를 비관해 서울 인왕산 남장대에 올라 장남에게 유서를 쓰고 자결해 죽은 안병범 장군이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반공정신의 상징으로 활용하기 위해 그의 죽음을 전사자 이상으로 간주해 순국자의 예우를 했다. 그뿐 아니라 계급을 대령에서 준장으로 추서하고 서울 동작동현충원에 묻어 주었으며 연이어 기념비(안병범장군순의비)마저 세워 주었다.
어떤 이유가 됐든 자기가 이준 열사도 아닌데, 어째 국군의 고위급 장교의 신분을 지닌 군인이 이제 막 시작된 전쟁에서 싸워 볼 생각을 하기는커녕 적에게 함락됐다고 자결을 하는가? 그런 인물을 참군인상과 반공의 상징으로 둔갑시켜 추앙받도록 만든 이승만 정권의 민낯이 보여 서울 현충원에서 그의 기념비를 바라보는 내가 더 민망했다.
80여명의 일제 친일파 장교들 중에는 해방 후에도 계속 남아 이승만 정권에 기생하여 요직을 차지한 60명의 군인들과 인사들이 있었다. 김백일, 김창룡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이 60명 중에는 ‘일제-이승만 정권-박정희 정권’ 까지 연속으로 관직을 받은 인사들이 무려 31명이나 있는데. 이중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신학진과 국회의원을 지낸 신상철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뿐 아니라 ‘일제-이승만 정권-박정희 정권-전두환 정권’까지 가담해 소위 4관왕을 달성한 친일인사도 무려 7명이나 됐다. 구한말부터 전두환 정권이 끝난 1988년까지 근 1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생존한 인물들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연세대초대 총장을 지낸 백낙준과 최장수 대법원장 기록을 가진 민복기가 이에 해당했다.
더 기막힌 사실은 ‘친일-이승만 정권-박정희 정권-전두환 정권-노태우 정권’까지 가담하여 무려 5관왕을 달성한 친일인사도 3명이나 존재했다. 이들 중에 고재필은 이곳 대전현충원 묘역에 묻혀 있고, 정일권, 김정렬은 서울 동작동 국립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이들 인사들은 모두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이념적 코드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또한 이곳 대전현충원은 전두환의 5공 쿠데타 인사나 비리인사들만 안장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지난 몇 년 전에 대전현충원을 참관했을 때,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3공의 핵심인물 김재춘 중앙정보부장의 묘지를 보았던 적이 있다. 1961년 5·16 당시 박정희 2군 부사령관(소장)을 도와 쿠데타를 주도했던 김재춘을 비롯한 3공시절 인사들도 다수가 묻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논란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39년 “충성을 다해 일본을 받들겠다”는 뜻의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保國 滅私奉公)’을 혈서로 써 만주군관학교에 보낸 친일파였다. 집권 후에 유신 시절에는 수백명의 언론인들을 쫓아내고 정권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좌파로 몰아 체포, 고문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서울 한복판에 박정희기념관이 보란듯이 건립되었고 그의 딸은 대통령에 재직중이다.
국가원수묘역에 홀로 잠들어 있는 최규하 대통령 묘소를 참관하며 묘역주변을 둘러보니 앞으로 7명을 더 안장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해 놓았다. 그렇다면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있는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들 3인의 묘소들을 공평하게 이곳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해 재임순서별로 안장하는 것이 마땅하다. 유가족들이 이곳으로 이장되는 것을 마다한다면 선택권을 주어 윤보선, 노무현 대통령들처럼 사립묘역이나 선산에 묘지를 조성하여 각자 알아서 개별적으로 안장하면 될 것이다.(끝)
 

광복70년 분단 70년 특별기획 [남북의 국립묘지를 찾아 역사화해를 모색하다] 시리즈는
‘북한 국립묘지 참관’ 부분을 모두 마치고 지난주 부터 2회에 걸쳐 ‘남한 국립묘지(국립서울현충원 편, 국립대전현충원 편) 참관기’를 시작하여 이번 회로 모두 마칩니다.
통일뉴스와 NK투데이에도 중복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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